<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미주에게선 오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현준은 자신이 미주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한동안은 미주의 연락을 부담스러워했었는데, 지난 주말 은설과의 노래방 데이트 이후 이상하게도 자꾸만 미주 생각이 났다.
새로 도착한 메시지가 없는 액정을 들여다보다가 현준이 살짝 화가 난 듯 화면이 바닥 쪽을 향하도록 휴대전화를 책상 위로 던졌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긴 했지만 발걸음은 방향을 잃고 방안을 서성일 뿐이었다. 부랴부랴 생각해 낸 목적지가 서재 한편에 자그마하게 마련한 홈바였다. 현준은 수면체처럼 한 잔씩 마시던 위스키를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한 잔 더 따르려던 손을 멈추고 현준이 몸을 움찔거렸다. 혓바닥부터 식도까지 타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현준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젠장, 폼나게 원샷하고 잠들려 했더니만.”
현준이 스트레이트 잔을 왼손에 옮겨 쥔 채 다시 언더락 잔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후드득.
얼음냉장고에서 얼음을 받아낸 건 언더락 잔이 아니라 사발만큼 커다란 머그잔이었다. 크리스털인 줄 모르고 언더락 잔에 함부로 얼음을 담다가 깨 먹은 것이 여럿이었다. 이혼 후 이 집으로 이사를 마쳤을 때 미주가 보내주었던 잔들은 이제 여덟 개 중 네 개만이 남아 있었다.
현준은 이제와 미주가 보낸 선물의 의미를 되새겼다. 함께 살 땐 언제나 미주가 준비해 주었던 술잔이었다. 사용했던 스트레이트 잔은 살살 씻어 건조대에 살며시 올려두고, 현준이 언더락 잔과 얼음이 잔뜩 담긴 머그잔을 모두 들고 서재로 돌아왔다. 원래 마시던 방식대로 얼음을 가득 담은 언더락 잔에 술을 채워 현준이 서재의 통창 쪽으로 의자를 끌었다.
서재를 통해 보이던 한강뷰가 마음에 들어 구했던 집이었다. 옅게 희석된 양주에선 향긋한 향이 났고, 살짝 취기가 오른 눈으로 바라보는 야경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뷰의 아래방향으론 소담스러운 가로등 불빛이, 위쪽으론 저 너머의 화려한 강남의 불빛이 보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내려주는 가로등 불빛은 은설을, 그리고 잡힐 듯 잡히지 않은 불꽃놀이 마냥 저 멀리서 화려하게 빛나는 강남의 불빛들은 미주와 닮아 있었다. 현준은 자신의 위치가 그 중간 어디쯤이라고 생각했다. 강 한가운데 서서 이리로 가야 할지 저리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방랑자의 조각배처럼 현준의 마음이 떠돌고 있었다.
“똥폼 잡으면서 혼자 뭐 하고 있냐?”
“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갑작스레 들리는 형석의 목소리에 놀라 현준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형석의 두 손에는 편의점 비닐봉지가 터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술과 안주가 가득 들려있었다.
“비번이 그게 뭐냐! 혹시나 해서 눌러봤는데 역시나 생일이네?”
“내 생일도 외우고 사냐?”
“혹시 옛날에 니 생일이라고 모였을 때 내가 여자친구 소개해 줬던 거 생각나냐? 그날이 내가 첫 사랑하고 처음 뽀뽀한 날이다. 니 비번하고 내 비번하고 똑같단 소리야. 그러니까 바꿔, 인마.”
형석이 서재의 책상 위에 잔뜩 사 온 안줏거리와 맥주를 우르르 쏟아내며 말했다. 책상 위에 풀어놓은 것들 사이에 예전부터 좋아했던 밀맥주가 마침 들어있었다. 형석이 사들고 온 것 중에 골라 먹는 주제이면서도 현준은 형석을 빈정댔다.
“당신도 첫사랑 못 있어서 궁상떠는 종자였구먼.”
“아니. 첫사랑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를 못 있는 거지. 내 황금기였어, 그때가. 미련이 많은 게 아니라 자기애가 강한 거야, 나는.”
“니 첫사랑이 들으면 섭섭하겠다.”
“들을 리 없으니 패스. 너도 잘 생각해 봐. 어쩌면 너도 이은설을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은설을 좋아하던, 그래서 무엇을 하든 완벽해지려고 애쓰던 니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랬다면 자신이 미주와 이혼했을 리 없었다. 이쪽 사회에서 가진 것이 미천한 축에 속하는 현준에게 미주만큼 완벽한 배우자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성도 미모도 재력도 모두 갖춘 미주와 도저히 함께할 수 없을 만큼 은설을 잊지 못했었다. 은설을 잃어버린 후로 단 한 번도.
“이은설을 네 잃어버린 그림조각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마. 너의 일부인 것은 이은설이 아니라 이은설을 좋아했던 네 추억이지. 아쉽게 끝이 났든 느닷없이 끝이 났든 추억은 그냥 그 상태가 온전한 모습인 거야, 니가 뭘 잃어버리거나 그런 게 아니라고.”
형석의 쓴소리에 현준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현준의 표정을 알아본 형석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진실이 때론 쓰기도 하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내가 무슨 말을 해준 건지 아마 알게 될 거다, 너도.”
딩동.
둘 사이에 흐르고 있는 불편한 기운을 가르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긴. 니 생일 잊지 못하는 ‘누구 한 사람 더’ 겠지.”
미주였다.
“불쑥 찾아와서 놀랬나? 나 예의 없었던 거예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현준에게 미주가 유명 초밥집의 로고가 새겨져 있는 종이백을 내밀었다.
“이거 같이 먹으려고. 어머, 손님이 또 계셨네.”
쇼핑백 너머로 보이는 형석을 미주가 알아봤다.
“오랜만이에요, 미주 씨.”
서재방 문간에 서서 형석이 미주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혼자 보낼 것 같아서. 어머님, 아버님은 해외로 봉사 나가셨다길래요. 아, 혜진이가 어머님, 아버님 하고 같은 봉사단 소속이어서 알았어요. 근데 형석 씨가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오늘이 무슨 날인가?”
“니 현관 비밀번호하고 같은 날이다.”
“어머. 계속 그 번호 써요? 뭐야, 전 부인이 아무 때나 막 찾아와도 괜찮은 거였어요?”
현준은 그제야 오늘이 자신의 생일임을 깨달았다.
미주가 현준을 제치고 형석에게 다가가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우리 거의 2년 만에 보는 거 같아요. 형석 씨는 갈수록 멋있어지네요.”
“내가 나이 먹을수록 인물이 사는 스타일이라 그래요. 하하.”
“어머, 호호. 위트도 여전하셔.”
“둘 다 내 생일 축하해 주러 온 거였어? 그럼 찾아온 목적부터 달성을 해야지 뭐 하고 있는 거야, 나 빼놓고 둘이.”
현준이 괜한 심통을 내며 미주와 형석에게 다가왔다. 그런 현준을 아랑곳하지 않고 미주가 형석에게 초밥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저녁 언제 드셨어요? 시간이 좀 늦네요. 벌써 드셨으려나? 그래도 같이 좀 드실래요?”
“제 저녁 저기 있어요. 아마 저 자식 저녁도 저걸 거예요.”
형석이 서재 안 책상 위의 주전부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포장을 뜯은 것이 몇 없는 것을 확인하고 미주가 방긋 웃으며 좋아라 했다.
“넉넉히 사 오길 잘했네요. 오마카세가 포장이 되길래 사봤거든요. 양이 꽤 많아요.”
“먹고는 싶은데 이혼한 부부 사이에서 밥 먹으면 체 할 거 같아서 저는 이만 빠질래요. 두 사람 싸우지 마시고 사이좋게 잘 나눠 드시길.”
“야, 먹고 가.”
소파 위에 벗어둔 재킷을 찾아드는 형석을 현준이 말렸다.
형석이 ‘넣어 둬, 넣어 둬’ 할 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손사래를 치며 현관 밖을 빠져나갔다.
거실에 덩그러니 남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