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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나름의 배려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꼴깍.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정적 안으로 아주 옅게 흘러나왔다. 먼저 움직인 것은 현준이었다.

“앉아.”

현준이 소파 쪽으로 가 미주보다 먼저 앉았다.

“응. 이거 어떡할래요?”

“먹자. 배고파.”

미주가 포장해 온 오마카세를 탁자 가득 풀어놓았다.

“진짜 많네.”

“형석 씨도 좀 먹고 가면 좋았을 걸.”

현준이 나무젓가락 두 개를 뜯어 하나는 미주에게 건네고, 남은 하나를 바로 집어 회를 한 점 잡았다.

“잠깐만요.”

맛있게 입에 넣으려는 찰나에 미주가 현준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쇼핑백 안에서 초와 성냥을 꺼내어 회 사이사이에 꽂아 불을 붙였다.

“생일이니까.”

싱긋 웃어 보이는 미주의 얼굴이 촛불의 주광색 빛을 받아 한결 아름답게 반짝였다.

“노래는 생략할게요. 쑥스러. 어서 촛불 불어요.”

“응.”




하나, 둘, 셋.

후-.

짝짝짝.

미주를 알게 된 이후로 가장 소박하게 치른 생일이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요?”

“응? 아······.”

소원은 빌지 않았다. 그저 미주의 구령에 맞춰 자신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냥. 다 잘 되게 해 달라고.”

“그럴 리가."

“왜?”

“그렇게 구체적이지 않은 소원을 빌리가 없어요, 선배가. 소원 안 빌었죠? 그렇죠?”

“응.”

“괜찮아요. 내가 대신 빌었으니까.”

"무슨 소원이었어?"

“그냥 이렇게. 이대로도 괜찮으니까 앞으로도 선배하고 딱 이만큼만 좋은 사이로 지내게 해 달라고.”

말하는 미주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지만 현준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집에서 뭐라 하시지 않아? 여기 이렇게 드나드는 거 알고 계실 텐데.”

“자식 이기는 부모 봤어요? 요즘 나 우리 집에서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예요. 건드리지 않는 게 최선인 망나니 딸이라고요.”

미주의 으름장에 현준은 피식 웃음이 났다. 미주는 그럴 만큼 막무가내인 성격이 아니었다.

“진짠데. 암튼 그건 걱정 마요. 아버지도 별말씀 안 하시던 걸요. 내가 아직 어떤 마음인지 어렴풋이 알고는 계시니까. 아마 그래서 그냥 놔두시는 거겠죠, 뭐.”




현준은 마지막으로 장인을 보던 날을 떠올렸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 정적보다 담담한 말투로 장인은 미주를 걱정했었다.

“서류 진행 이쪽에서 맡아하지. 말릴 생각 없어.”

“네.”

“자네를 단숨에 끊어 내는 게 자네한테도 좋을 거야.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거라 믿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

“단숨에 끊어내지 말아. 그 아이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

“한 번도 내 뜻을 거스른 적이 없던 아이야. 이 결혼도 결국 내 뜻을 따라 했던 것이고, 이혼도 자네와 내가 최종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미주는 자네를 진심을 좋아했어. 그 아이 그 마음까지 내 맘대로 하고 싶지는 않구먼.”

“알겠습니다.”

누구의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장인이었지만 미주에게만은 한 없이 너그러웠고, 그런 장인의 진심 어린 부탁이었다. 미주의 마음을 알면서도 먼저 이혼을 요구했었기에, 미주의 마음에 대해서는 현준도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현준은 장인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혼 한 이후로 선배하고 나, 사이가 훨씬 더 좋아진 거 알아요?”

현준의 회상을 깨뜨리며 미주가 말을 걸어왔다.

“응?”

“선배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그랬나?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적어도 나는 그랬어요. 선배 대하기가 한결 편해요. 근데 웃기잖아요. 이혼을 했는데 오히려 더 사이가 좋아지고 편안해지다니. 왜 그런가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선배한테 바라는 게 없어졌더라고요, 이제.”

“······.”

“바라는 게 없으니 선배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 한 결 여유가 생겼어요. 그래서 밉지도 않고, 섭섭하지도 않아. 그래서 마냥 선배가 좋아. 좋다는 게 뭐랄까. 그냥 잘 되었으면 좋겠고, 응원해주고 싶고 그렇게 좋은 거요. 그래도 아직 새 여자친구는 사귀지 마요. 질투 날 거 같아, 그럼”

미주의 담담한 고백에 현준은 가만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웃지 마요. 선배가 그러면 아직은 설렌다니까. 4년이나 살았으면 뭐 해. 제대로 같이 산 적은 1년도 채 안 되는 거 같아. 그러니 이렇게 아직도 가끔씩 막 설레고 그러지. 아주 지긋지긋하게 싸우다 끝났어야 ‘질렸다 질렸어!’ 막 그러면서 안 보고 살 텐데.”

미주가 귀엽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미주의 행동은 확실히 자신의 태도와 달라 보였다.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편안히, 이제는 주변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현준이라는 존재만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영화 보러 갈까?”

느닷없는 현준의 제안에 미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짧은 침묵을 지키던 미주가 현준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아니.”

“왜?”

전혀 예상치 못한 미주의 거절에 현준이 단박에 ‘왜?’라고 물었다.

“그건 진짜 데이트하는 느낌이 날 거 같아서요.”

“그러면 안 되나?”

미주가 대답 대신 웃는 낯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정색했다.

“밥은 같이 먹어도 되고 영화는 같이 보면 안 되는 거야?”

“왜 그래요, 새삼스럽게. 먼저 이혼하재 놓고 무슨 수작이래?”

“······.”

현준은 할 말이 없었고, 문득 미주에게 미안했다.

“진짜 왜 그래요? 정말로 이제 내가 그냥 편한 친구 같아서 그러는 거예요? 생일에 혼자 영화 보러 가긴 싫으니까 같이 가자, 뭐 그런 거? 아님 무슨 생각으로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는 거예요?”

“······.”

“친구라고 생각해서 했던 제안이라면 더더욱 노(NO)!”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생각해 보니 미주하고는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고 시시한 이야기 주고받으면서 재밌어하고 그러는 거.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던 거 같아서.”

“······. 영화도 같이 보러 간 적 없긴 해요.”

“아, 그랬나?”

“이혼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영화관 데이트 신청받은 거예요, 지금 나.”

“우리가 그렇게 지냈었구나.”




미주는 사들고 온 오마카세 도시락만 다 먹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더 있으면 위험할 거 같아서 안 되겠어요. 호호.”

“상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냥 영화나 한 편 보자는 거였는데, 뭘.”

“그거야 모르지. 아무튼 오늘은 더 같이 있지 않을래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어.”

“영화 보는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거야?”

“혹시 뭐 다른 거를 ‘영화’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내가 평소에 그런 식으로 대화한 적이 있던가?”

“선배 지금 평소랑 180도 달라요. 그래서 도망 나가는 거예요, 지금 나.”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야?”

“다요. 영화 보자는 얘기 꺼낸 후부터 지금까지, 쭉 다. 이렇게 끈질기고 집요하게 뭐 하자고 따라붙던 적도 없었다고요, 류현준 씨.”

“설마. 끈질기게 매달리는 게 내 주특기인데.”

“나한테는 안 그랬었잖아요. 한. 번. 도. 대체 언제 누구한테?”

“······.”

“첫사랑 때?”

“······. 공부할 때.”

한 번 더 생각하고 대답을 하는 모양새였고, 미주가 그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맞네. 첫사랑한테 그랬나 보네.”

이야기를 하면서도 미주는 잘도 외투를 찾아 입고 요리조리 발을 놀려 힐을 바로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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