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
“집에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한 번 더.”
“두 번이나 왜?”
“살아 있나 확인하려고요. 사람이 너무 갑자기 변해도 이상한 거라잖아요.”
“변하지 않았다니까. 나는 원래······.”
“그럼 그전엔 나한테만 안 그런 거였어요? 장난스러운 말투, 유쾌한 웃음, 놀러 가자며 조르고 우기는 어리광······. 선배의 그런 모습은 나만 모르고 있던 건가?”
“어.”
미주의 눈빛이 흐려졌고, 순식간에 빨개진 아랫눈꺼풀 위로 눈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현준의 대답이 반은 장난이 섞인 것인 줄 알고는 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편하게 대한 적이 없다는 뜻도 있는 것만 같아 미주는 괜스레 서러웠다. 울먹이듯 들썩이는 미주의 입술을 보고서야 현준이 변명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최근에서야 깨달았어. 단 한 번도 미주에게 그랬던 적이 없었다는 거. 그래서 확인해보고 싶었어. 내가 온전히 마음을 열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은 건지. 할 수가 없었던 건지.”
“영화 보러 안 가길 잘했네. 확인해 봤더니 ‘역시나 안되더라’로 결론 나면. 슬프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를 거 같아. 왜 뒤늦게 쓸데없이 솔직하고 그래요, 잔인하게? 이런 말 지금 굳이 안 해도 되잖아.”
“말해야 같이 영화 보러 가줄 줄 알았지.”
미주가 들고 있던 백을 높게 쳐들어 현준을 냅다 후려쳤다.
“아얏!”
퍽. 퍽. 퍽.
“못 됐어. 못 됐어. 그 눈빛 뭐야. 남은 진지한데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여왕의 진주만큼 커다란 눈물방울을 방울방울 떨구며 미주가 현준의 가슴팍 여기저기로 가방을 날렸다.
“온전히 마음 열 생각도 없었으면서 결혼해서. 진짜 미안해. 진심으로······.”
“뭐라고요?”
현준에게 날리던 가방을 멈추고 미주가 현준의 얼굴을 응시했다.
“미안하다고. 상처 줘서. 이제야 조금 이해했어. 미주가 받은 상처가 어떤 것인지.”
“······.”
“요 며칠 미주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 우리 결혼생활과 이혼에 있어서 늘 버거운 처가의 그늘이 나를 괴롭게 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지, 문제의 중심에 나를 세워두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
“겉으로만 내 탓인 척했을 뿐, 속으론 내가 버텨내지 못한 이유를 미주와 미주 집안 탓으로 돌렸었어.”
“······”
“미안해. 진심으로.”
미주는 계속 아무 말이 없었다.
“미주가 허락한다면 한 번은 온전히 미주에게 집중해보고 싶었어.”
처음으로 들어보는 현준의 속내였다. 언제나 완벽하기에, 단 한 가지도 반성할 것이 없는 사람 같았던 현준이 그간의 무심함에 대해서 미주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있었다. 현준의 고백 아닌 고백을 듣는 미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나만 물어요. 어쩌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갑자기.”
“그건·····.·”
현준이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왜 그래요? 내가 물으면 안 되는 걸 물은 거예요?”
“아니.”
잠시 더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현준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 친구를 다시 만났어. 아무 계산 없이 예전처럼 웃고 얘기 나누다가, 미주 생각이 났어.”
“아주 오래전 친구 누구요?”
“······.”
“이은설?”
미주는 현준에게 더 묻지도,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현준은 쓸쓸히 뒤돌아서는 미주를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우두망찰 했을 뿐이었다. 그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고, 열흘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내 머릿속이 복잡해 현준은 미칠 것만 같았다. 이제껏 접해보았던 그 어떤 의학적 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한 자신의 심리상태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오래전 친구가 이은설임을 알아챈 미주의 섭섭함 가득했던 반응에
“어차피 이혼한 사이 아니야. 이은설을 다시 만난 사실을 알았다 한들 그게 미주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라며 혼잣말을 지껄이다가, 이내 바람을 피우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미주에게 뒤늦게나마 마음을 쏟아보려는 자신의 행동이 미주를 위한 것인지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헷갈렸다. 한편으론 미주에게 이런저런 마음을 쏟는 이 시간들이 은설에게 미안했다.
“이미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 전처를 마음에 걸려하는 게 뭐가 어때서 케케묵은 첫사랑에게 미안해하는 건데?”
이제 누구와도 깊은 관계가 아니지만, 마치 의도치 않게 양다리를 걸치기라도 한 것처럼 죄책감이 몰려왔다.
“선생님, 첫 환자분 들어오시라 할까요?.”
근간에 아침마다 현준의 상념을 깨 주고 있는 것은 정간호사의 목소리였다. 현준은 그 어느 시기 보다도 집중해서 진료를 했다. 그래야 그나마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상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진료가 아닌 때에는 아무 때고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미주와 은설에 대한 생각에 휩쓸려 도무지 일상의 일들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세요. 정간호사, 오늘도 같이 파이팅 합시다!”
구령을 붙이듯 파이팅을 외치는 현준을 향해 정간호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파이팅 하시라고 첫 환자분으로 이은설 씨가 오셨나 봐요.”
현준이 책상 위의 달력을 쳐다봤다.
‘벌써 올 때가 되었구나!’
하루를 백 년처럼 보내며 기다렸던 은설의 진료일이 이번엔 부지불식간에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정간호사의 말이 있기 전까지는 은설의 진료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현준이 가슴팍의 가운 주머니에서 오래된 펜을 꺼내어 다음 진료일로 예상되는 날짜에 가늘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잊고 있었다니.’
은설과 관련된 일을 잊는다는 것은 지난 20년 간 현준에겐 일종의 배신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비록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배신이었지만, 그럼에도 현준은 은설에게 너무 무신경했던 것 같아 괜히 미안했다. 동그라미를 그려 놓은 날짜를 재차 확인하는 사이 은설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잘 지냈어?”
현준이 그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반갑게 인사했다.
“얼굴이 푸석해 보이네. 무슨 일 있었어?”
은설이 대답 대신 반문을 하며 현준을 걱정했다.
“아니. 그냥 잠을 좀 못 자서.”
“왜?
“······ 연구 때문에?”
현준은 퍼뜩 생각이 나는 대로 연구 핑계를 대었다.
“아아. 참! 이거.”
은설이 더는 궁금하지 않았는지 질문을 멈추고, 들고 온 가방 안에서 작은 포장상자를 꺼내었다.
“뭐야?”
눈이 동그래진 현준이 은설이 내민 상자와 은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받기를 망설여했다.
“받으면 안 되는 거야? 여기 민간 병원인데도?”
“아니.”
“그럼 얼른 받아. 팔 아파.”
“뭔데?”
“뭐긴. 니 생일선물이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현준이 선물을 건네받았다.
“기억하고 있었어?”
“그럼. 어떻게 잊냐? 니 생일에 우리 집이······. 이 얘긴 됐고. 암튼 매년 기억이 나긴 했었어. 올해는 정말로 선물을 줬네.”
은설이 싱긋 웃어 보였다.
“뜯어봐. 아, 시간이 없으려나? 내 뒤에도 사람 많던데.”
“응. 고마워. 나중에.”
현준이 고이고이 모시듯 소중히 선물상자를 책상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별 건 아니야. 보니까 아직 그 볼펜 쓰고 있길래. 펜촉 몇 개 샀어.”
“아, 이거.”
현준이 오래된 볼펜을 가슴팍의 주머니에서 꺼내었다.
“20년 다 되어가는데도 잘 써지나 봐?”
“응. 손에 익어서 그런가 이젠 이 펜이 제일 편하고 좋네.”
“사실 펜촉 많이 샀어. 두고두고 오래 써. 그리고 새 펜도 하나 더 넣었어. 그것도 20년 동안 써줘.”
은설이 뿌듯한 듯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은설을 따라 웃고 있었다. 은설을 만나는 순간엔 머릿속의 모든 상념과 고민들이 거짓말처럼 흩어져버렸다.
“너는? 어땠어? 새로 바꾼 약은 괜찮았어?”
“응. 몸 상태는 전보다 한 결 나아.”
하지만, 말과는 달리 은설의 낯빛이 그리 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