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헉, 어머 어뜨케에!!! 아아아악!!!!!”
혼자 운전하고 가는 차 안에서 은설은 솟구쳐 오르는 당황스러움과 그것에 동반하여 상승한 스트레스만큼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씨, 기범이 이눔시키 땜에!”
분노가 사그라들 때까지 기범이를 원망하기로 결심한 듯, 은설이 알고 있는 욕설을 모두 다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종례직전 마지막 교시를 맡은 담당교사가 학급회장을 은설에게 보냈다. 하필이면 한문시간이었고, 한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기범이가 커터칼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제 손을 깊이 베인 모양이었다.
“기범이는 한문 선생님하고 보건실 갔는데요, 한문 선생님이 기범이 많이 다쳐서 보건실에서는 응급처치만 하고 부모님하고 병원 가야 될 거 같다고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래요.”
학급회장에게 종례 때 나눠 줄 가정통신문을 일단 들려 보내고, 은설은 곧장 보건실로 갔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피로 얼룩져 엉망이 된 한문교사 한 부장의 하얀 와이셔츠 소매였다.
“어머, 부장님! 기범이 심각하게 다친 거예요? 부장님은 괜찮으시고요? 혹시 부장님도 다치신 거예요?”
“아니야. 지혈시켜 주려다가 손끼리 꼬여서 애 피가 좀 묻은 거야. 쟤는 좀 다쳤고.”
한 부장이 파티션 너머에서 보건교사로부터 응급처치를 받고 있는 기범이를 가리켰다. 등어리만 삐쭉 보였지만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기범아, 괜찮아?”
은설이 파티션 안으로 빼꼼히 얼굴을 들이밀자마자 기범이가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인마, 잘 참다가 왜 이제 눈물을 흘리고 그래. 담임샘 보니까 울컥했어?”
보건 교사가 응급 드레싱을 마무리했다는 표시처럼 기범이의 등을 ‘탁탁’하고 두 번 두드리며 장난스레 놀리는 말을 했다. 보건교사의 표정을 보니 아주 심각한 상처는 아닌 모양이었다.
“쌤, 어흐흐흑.”
은설은 일단 기범이부터 달래었다.
“많이 아파? 어떡해. 참을 만 한 거야? 보건선생님, 진통제라도 먹여야 하는 거 아닐까요?”
"괜찮아요. 어차피 바로 병원 갈 거니까 거기서 약은 처방받아서 먹는 게 나아요."
“참을 수, 흑, 있어요.”
기범이가 눈물을 훔쳐내며 의젓한 체를 했다.
“야, 기범이 이제 애 아니구만. 어른 다 됐네. 눈물 짧게 끝내고 참겠다 하고.”
기범이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나오고 있었지만, 은설은 칭찬을 미리 당겨 해 주었다. 은설의 말과 거의 동시에 기범이의 눈가가 빠르게 말라갔다. 아이가 안정을 좀 찾아가는 것을 보고 보건교사가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지를 이야기했다.
“옷에 피를 잔뜩 묻히고 와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혈관까지 베인 건 아니에요. 그래도 학부모한테 연락해서 바로 병원엔 가게 해야 할 거 같고. 파상풍 예방접종 했냐고 물어보니 애가 모르겠다네.”
“기범이 상태 어떤지 확인하고 연락하려던 참이었어요. 바로 전화할게요. 기범아 엄마 전화번호 불러 봐.”
“공일공, 훌쩍, 삼일구삼······.”
“애 보다 한 부장님이 더 놀래신 거 같아요. 애는 그냥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어있었고 한 부장님은 얼굴이 하얘지셔가지고 손도 막 떨리고 그러셨다니까.”
“내가 원래 피를 잘 못 봐서 그래. 얼굴이 그래서 좀 하얘졌나 보네. 하하.”
한 부장이 멋쩍게 웃었다.
“부장님, 정말 감사해요. 많이 놀라고 힘드셨을 텐데. 부장님도 피 무서워하시는구나. 저도 좀 그래요. 전쟁영화 같은 거 잘 못 봐요.”
“아우, 난 고기도 안 익은 건 잘 안 쳐다봐.”
놀란 와중에도 아이를 돌보아준 한 부장에게 가벼운 농을 섞어가며 감사 인사를 하는 사이 기범이의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은설이 빠르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네, 어머니. 지금은 응급처치를 해서 지혈도 어느 정도는 되고 있는 상태고요. 기범이도 많이 진정을 했어요. 아, 그럴까요? 기범아, 너 혼자 병원 갈 수 있겠어? 엄마가 새날병원으로 바로 가시겠다고 하시는데?”
“네.”
“예, 어머니. 그럼 기범이 바로 병원으로 보내겠습니다. 아니에요. 마지막 교시 마치고 종례시간도 거의 다 지나서요. 네 조퇴는 아니니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았지만, 다친 아이를 혼자 병원으로 보내려니 은설은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엄마가 바로 퇴근하고 오셔도 한 시간은 걸릴 거라 하시는데, 선생님이 데려다줄까? 좀 기다릴래?”
기범이의 의사를 물으면서도 은설은 고2나 된 남자아이가 굳이 담임과 함께 병원엘 가려하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네.”
은설의 예상과 달리 기범은 종례와 청소시간을 기다려 은설과 함께 가겠다고 했다.
“그래. 선생님이 데려다줄게.”
어리광이 조금 섞인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기범이에게 은설이 괜찮을 거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샘, 저 쪼끔 어지러운 거 같아요.”
“그래?”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은설은 열을 재는 것처럼 기범의 이마를 짚어주었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보건교사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어지러울 정도로 피를 흘리지는 않았는데.”
보건교사가 다가와 기범이의 아랫눈꺼풀을 양쪽 모두 번갈아 까뒤집어 보며 말했다.
“많이 놀라서 그럴 거야. 피도 멎어가고, 담임 쌤도 보고, 엄마한테 연락도 가고 하니까 긴장이 확 풀리면서 그럴 수 있어. 기범이 혹시 담임 쌤 좋아해서 일부러 엄살 피우는 거 아냐?”
보건교사가 긴장을 풀어주려는지 짖궂게 아이를 놀렸다.
“좋아는 하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쌤 유부녀예요.”
“뭐야, 기범이 내가 아가씨 아니어서 일부러 쪼끔만 좋아하는 거야?”
“가능성이 없잖아요, 쌤은.”
“그럼 결혼 안 한 여자 선생님하고는 가능성 있고?”
한 부장이 기가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치며 기범이의 말장난을 받아쳤다.
“10살 정도까지는 커버할 자신 있어요.”
“어이구. 누가 좋아는 해준대? 중학교 졸업한 지 이제 일 년 반 밖에 안된 애기를?”
드레싱을 해주면서 기범이와 제법 빠르게 가까워진 보건교사가 기범이의 말장난에 한몫을 거들며 들어왔다.
“샘. 저한테 애기라는 표현을 쓰시다니. 그건 좀 징그럽습니다.”
“너 지금 안 어지럽지. 이렇게 따박따박 말장난하는 거 보니까 다시 기가 살아난 거 같은데?”
“아니에요. 저 평소보다 말빨 떨어진 상태예요, 지금.”
기범이 자신의 컨디션을 알아챈 은설에게 다시 엄살을 부렸다.
“이제 그만 올라가자. 교실에 있는 애들이 너무 오래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