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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티타임(2)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이쌤은 계속 병원 다니는 거지?”

“네.”

“자식은 참 낳아도 걱정, 못 낳아도 걱정.”

“요즘은 안 낳고 걱정 안 하고 사는 사람도 많아요. 전 나중에 결혼 조건으로 애기 안 낳는 거 얘기할 거예요.”

20대 중반의 아가씨인 행정실무사 은주 씨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뭐 안 낳고 싶으면 그러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최근 속 썩는 일이 많았던 성 부장이 심드렁하지만 진심이 조금 담긴 듯한 말투로 맞장구를 쳤다.

“이쌤은 낳고 싶은 거잖아. 왜 낳고 싶어? 이 근심덩어리를?”

누구보다 솔직했던 성 부장의 질문인 터라 은설도 속내를 드러내기로 했다.




“애초에 애기가 낳고 싶어서 결혼을 했던 것도 있어요.”

“어머. 그랬어?”

김 선생이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놀라워했다.

“20대 후반부터 누가 아기를 안고 있는 걸 보면, 그 모습이 아기가 아니라 엄청 트렌디한 명품가방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은설이 한쪽 품에 아기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숄더백을 걸치는 시늉을 했다.

“하하하. 이쌤 원래 애기 되게 좋아했구나.”

“좋아하는 사람한테 더 안 생긴다는 속설을 요즘 체감하는 중이에요.”

“생길 거야. 그렇게 이뻐하면 언젠간 생겨.”

성 부장이 예부터 내려오는 속설 같은 말로 위로와 격려를 겸한 말을 은설에게 건넸다.

“지금은 남들 다 하는 걸 나만 못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에 화가 나서 더 집착을 하는 것도 있는 거 같아요. 여태 아무 이상 없이 멀쩡히 잘 살았는데 원인불명으로 안 생긴다니까 못 참겠어요, 이 상황을."

"맞아. 나도 그 감정 알아."

맞장구를 치는 김 선생의 눈빛이 회한에 젖은 듯 순식간에 흐려졌다.

"그리고 정말 순수하게 동물적인 본능으로, 출산이라는 게 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정말? 난 시험관 하면서도 이거 잘 되면 출산을 해야 할 텐데 어쩌나 하고 무서워했었어. 보기보다 용감한 스타일이다, 은설 쌤.”

은설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된 김 선생이 몹시 낯선 것을 보았을 때처럼 곁눈질로 은설을 바라보았다.




온통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이야기로 가득했던 티타임이 끝나고 모두들 다음 교시를 준비하기 위해 자기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온 은설은 오늘 아침에도 약국이 문 열기를 기다려 사온 페마린을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이거 먹고도 잘 자라주어야 할 텐데.’

노트북 화면 오른쪽 아래의 자그마한 시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은설이 머릿속으로 시간 계산을 했다.

‘안 까먹고 먹을 수 있는 시간. 언제가 좋으려나. 종례! 그래. 종례 때 먹어야지. 종 땡 치자마자 이거 먹고 교실 올라가는 루틴을 만들면 안 까먹겠지.’

“커피 마시니까 더 출출하다. 뭐 해? 약 먹을 시간이야?”

갖고 있던 과자를 은설에게 한 봉지 건네려다가 약을 본 김 선생이 물었다.

“아뇨. 몇 시에 먹어야 안 까먹으려나 고민 중이었어요.”

“약 바뀌었네. 페마린?”

“네. 샘 기억력 좋으시다.”

“뭐, 클로미핀 아니면 페마린이지. 왜 바꿨어? 그거 비싼데.”

“부작용이 살짝 있었어요.”

“어머, 그랬구나. 몰랐네.”

“별로 안 심했어요. 학교에서 그랬던 것도 아니고. 샘은 부작용 같은 거 없었어요?”

“나도 약간 있었어. 복시가 생겨가지고 책을 잘 못 봤지."

"어머! 저도 복시!"

"샘도 그거야? 복시가 생각보다 많아. 내 고등학교 동창도 그랬어. 아휴, 고생 많네."

"제 고통을 진짜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니 왠지 반가운데요."

"안 겪어보면 몰라 진짜."




김 선생이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은설을 불렀다.

"자기야."

"네? 왜요, 샘?"

"시험관까지 했던 난임 선배로서 정말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건데, 진짜 한 번 더 잘 생각해 봐."

"?"

"송 부장님처럼 엄친딸을 낳아놔도 언젠가 썩일 속은 썩이는 게 자식이라고. 그 약 먹으면 우리가 ‘쌔끼’라고 부르는 그놈의 자식들을 낳게 되는 거야. 잘 생각해 보고 그거 먹어.”

언뜻 말리는 듯 하지만 반드시 아기가 생길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긴 김 선생의 오묘한 농담에 은설이 빙긋 웃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기가 갖고 싶어요.”

김 선생의 말이었기에 웃고 들으며 오해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근간에 은설의 귀에는 그런 류의 농담이 가시처럼 거슬렸다. 낳아봐야 후회뿐이니 자식 없이 사는 건 어떠냐는 말이 마치 가진 자의 잘난 척처럼 들렸다. 웃으며 말하는 은설의 얼굴에 쓸쓸함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김 선생은 이내 말을 바꾸었다.




“낳아 놓으면 세상에 더없이 이쁘긴 해. 이쁘니까 참고 키우지. 평생 짝사랑으로 변할 날이 나도 얼마 안 남긴 했지만.”

“평생 짝사랑이요?”

“애기 땐 나만 사랑해 주는 거 같더니 다섯 살 넘으니까 같은 반 여자애 좋아하더라."

"푸핫."

은설이 무심결에 입에 머금었던 물을 살짝 뿜었다.

"둘째도 그래. 여자애라고 다를 거 없더라고. 좋아하는 남자애만 다섯 번째 바뀌었어.”

“하하하. 평생 짝사랑이 그런 의미였어요?”

“단적으로 보자면. 근데 그것뿐만은 아니고."

"또 어떤 게 섭섭하셨길래?"

은설이 장난 섞인 말투로 질문했다.

"부모는 평생 자식바라기처럼 시선이 자식한테 쏠린 채로 사는데 자식들은 안 그러잖아. 항상 집 밖을 향해 있지. 뭐 나도 그러고 컸고, 여태 그러고 살지만.”

돌아온 답변에선 사뭇 진지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

“그게 섭섭한 날이 오더라고. 생각보다 빨리.”

“다섯 살부터요?”

“그건 좀 오버해서 당겨 말한 거고. 애들 중학생쯤 되면 마음에서 조금씩 놓아주는 연습을 해야 하긴 할 거 같아. 욕심부리고 계속 가슴팍에만 끌어안고 있으려 하는 사람들 보면 거의 다 애들이 부모한테서 도망가더라고."

“왠지 슬프다.”

"애들 스무 살 되면 완전히 독립을 시켜야지."

"진짜 내보내시게요?"

"응. 내 마음에서만. 집은 지들이 돈 벌 때 나가는 거고. 돈이 없어서, 방 얻어주고 나가라는 건 못 해줘. 할 수 없이 끼고 살아야 해. 하아알 수 없이."

"아아, 하하."

“자식은 낳기 전이나, 낳은 후나 잃어버린 그림조각 같은 존재더라고. 미친 듯이 찾고 싶어서 온 집안 뒤져 찾아 놓아도 얼마 못 가 다시 사라지는 퍼즐조각. 딱 그거야. 그래도 지금은 일단 찾고 싶지?”

“네. 무조건.”

“맹목에 가깝구먼. 어쩜 그렇게 나랑 똑같니, 자기.”

“근데, 이런 마음이어야 버틸 수 있는 거 같아요, 난임은.”

“그 말도 맞긴 해.”

은설과 김 선생이 서로를 마주 보며 씁쓸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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