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미주의 분노보다는 은설의 슬픔을 풀어내고 싶었다. 경중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조금 더 급한 일처럼 느껴졌다. 미주와의 일은 당장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은설에게 건네는 위로와 격려는 조금이라도 은설의 상황을 나아지게 하리라 생각했다. 선물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단 약간의 부채의식도 현준의 등을 은설 쪽으로 떠밀었다.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펜촉이라니.'
현준은 그것이 은설이 지난 20년의 시간 동안 현준을 잊지 않고 그리워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인생에 충실하며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만들려 하고는 있지만, 현준과의 추억은 추억대로 소중히 간직해 주었던 은설이 고마웠다. 아니, 이런저런 이유를 대어서라도 지금은 은설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진료실을 나서던 은설의 눈빛이 14살 여름에 현준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은설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을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는 사람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눈빛. 은설은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일 터였다. 아마도 은설이 지나왔던 시간들이, 또 난임이라는 상황이 은설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14살에는 해주지 못했던 위로를 이번에는 반드시 해주고 싶었다.
“정간호사, 5분간 휴진이요.”
“잘 생각하셨어요. 선생님 오늘도 완전 뺑이······. 아니, 열일 하셔선지 다른 때보다 유독 힘들어하시는 게 보여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거 아녜요? 자꾸 머리도 막 흔드시고.”
“아, 그게 집중이 잘 안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정간호사의 말에 성실히 답변을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현준이 이내 입을 닫았다. 정신줄을 살짝 놓은 입술이 ‘은설이가 자꾸 생각나서’라고 까지 말할 기세였다.
“아픈 건 아니고 컨디션 난조 정도.”
일부러 말을 아끼려는 듯한 현준의 뉘앙스를 알아차린 정간호사가 더 묻지 않고 잠시 진료실 밖으로 나가 커피 한 잔을 뽑아왔다.
“이럴 때야말로 자판기 커피가 필요한 순간이죠.”
정간호사로부터 커피를 건네받은 현준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정간호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러나는 동료애로 드리는 거니까 걱정 마시고 드세요.”
“고마워요.”
정간호사는 현준이 ‘간호사에게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는 의사’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현준은 자신을 위로해 주려는 정간호사의 마음이 고마워 평소에는 입에 잘 대지 않는 자판기 커피를 남김없이 마셨다. 그러면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은설에게 보낼 메시지를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일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게. 나도 조마조마했어. 우리 반 애 누구가 또 사고 치면 어쩌나 하고.”
현준의 차에 오른 은설이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말썽쟁이가 있나 봐?”
“응. 나쁜 애는 아닌데, 항상 사고가 따르는 녀석이 하나 있어. 18살인데 아직도 장난을 못 끊어서.”
은설은 기범이가 떠올라 싱긋 웃음이 났다.
“아침보다는 기분이 나아 보이네. 다행이다.”
“혹시 아침에 내 기분이 우울해 보였던 것 때문에 오늘 갑자기 저녁 먹자고 한 거야?”
“아니, 뭐. 겸사겸사.”
“겸사는 뭔데?”
“그, 갑자기 옛날에 자주 사 먹었던 떡볶이가 생각이 나서.”
“떡볶이?”
“응, 또와 떡볶이.”
“그럼, 우리 지금 광장동으로 가는 거야?”
“응!”
신이 난 현준의 말투와는 달리 은설의 얼굴에선 긴장이 묻어났다.
“혹시 불편해? 괜히 가자고 했나?”
“아니야. 그런 거. 14살 때 동네 떠난 뒤론 한 번도 그쪽으로 가보질 않아서. 그냥 살짝 긴장이 되네.”
설렘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이었다. 현준은 어쩌면 자신이 긁어 부스럼을 만든 실수를 한 것이 아닌지를 걱정했다.
“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돼. “
“나도 가보고 싶어. 마지막이 엉망이었어서 그렇지 그 동네 살았던 때의 추억은 다 좋았거든.”
“나도?”
“하하, 너도. 당연히 그렇지. 그랬으니까 20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그렇게 반가웠지.”
“반가웠구나. 처음에 니가 왜 거기 앉아있냐면서 화내서 별로 안 반가운 줄 알았더니.”
반가웠다는 은설의 말에 기분이 들뜬 현준이 장난스레 지청구를 했다.
“장소가 좀 그랬잖아. 지금도 여전히 거기를 들락날락하곤 있지만.”
은설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곧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반가웠지만, 14살 때 그 일도 자연스럽게 따라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 한창 예민하던 시기에 있었던 일이라 아무래도 상처가 되긴 됐었나 봐.”
“그랬겠지.”
“다 버리고 도망치듯 떠나버렸으니까, 나중에 사정이 나아진 뒤에도 다시 그때와 관련된 것들을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더라. 딱 하나 남겨진 게 수지와의 인연뿐이었어. 그것도 수지가 나를 계속 찾아서 이어지게 된 거야.”
“수지가 나보다 나았네.”
“엄마들끼리도 연락을 하셨었으니까. 그때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우리 엄마가 수지네 아줌마께도 생활비를 좀 빌리셨었나 봐. 수지네도 사정이 빤했는데 아줌마가 쌈짓돈 모은 걸 주신 거였었대. 그 동네 뜨고 나서 돈을 좀 벌게 됐을 때, 제일 먼저 수지네 아줌마한테 진 빚부터 갚으셨대. 그 와중에 다시 수지랑 나도 소식이 닿았고. 한동안은 수지가 더 적극적으로 나한테 연락을 해왔었어.”
“고마운 친구네.”
“응. 무척이나. 수지 아니었음 학창 시절이 아주 엉망이 되어버렸을지도 몰라.”
“그건 상상이 잘 안 된다.”
“정말이야, 전학 가는 학교마다 분위기가 다 달라서 매번 적응하는 게 너무 어려웠거든. 일진 애들한테 찍힌 적도 있었고, 괴롭힘 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센 척해본 적도 있고, 껄렁거리면서 어울려 다닌 적도 있어.”
“니가?”
“응. 그랬다니까. 금방 다시 전학 가버려서 두 달도 채 못 놀았지만.”
“하하, 그럴 줄 알았어.”
“뭐가 그럴 줄 알았대? 나도 놀려고 마음먹으면 막 놀 줄 아는 애였다니까!”
별일 아닌 옛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왠지 무시를 당한 것 같아 은설은 발끈했다.
“하지만, 내가 봐왔었고 또 보고 있는 이은설 하곤 왠지 어울리지 않는데.”
“뭐, 솔직히 딱히 즐겁진 않았어. 그러고 노는 게.”
은설의 의식이 어디에도 마음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떠돌기만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긴 은설은 현준은 가만히 기다렸다.
“결국은 12년 동안의 학창 시절을 통틀어서 남은 친구가 수지 하나뿐이었어.”
“그랬구나. 수지는 지금 어떻게 지내? 아직 그 동네 살고 있나?”
“지금 태국 살아.”
“태국?”
“응, 회사 주재원으로 파견 나간 남편 따라서.”
“아, 결혼했구나. 형석이한테 이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야겠네.”
“형석이? 혹시 우리랑 같이 도서관 다니던 네 친구?”
“응. 형석이가 수지 좋아했었거든.”
“아, 정말? 옛날에 수지가 얘기했던 거 같기도 하다. 형석이가 자기 아니면 나를 좋아하는 거 같댔어.”
“알고 있었던 거야?”
“정확히 누굴 좋아하는지는 몰라서 둘 다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던 거 같아.”
“하하, 그랬었구나.”
웃고 떠들며 좋았던 추억들을 들추어내다 보니 어느새 차가 나루중학교 앞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