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내리자.”
현준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럼, 어디 한 번 부딪쳐볼까!”
나지막이 혼자만의 파이팅을 외치며 은설도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 사이 조수석 쪽으로 온 현준이 문을 열어 은설을 에스코트했다.
“오 느낌 이상해. 스포츠카에서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리니, 울면서 떠난 동네에 금의환향한 기분이야. 내 차도 아닌데.”
“나는 금의환향이 맞아.”
“하하, 맞네. 이거 니 차니까.”
“아니, 이은설하고 여길 다시 같이 와서.”
현준이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년처럼 발그레하게 상기된 현준의 두 볼에 은설의 마음이 설레었다.
“갈까?”
현준이 장난스레 팔짱을 내밀었다.
“그래.”
은설도 장난을 받아주듯 현준의 팔뚝을 살짝 잡았고, 둘은 마치 무도회장으로 향해 걸어가는 왕자와 공주처럼 ‘또와 분식점’ 쪽으로 걸었다.
분식집의 어두운 실내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문지기가 있었네.”
“응?”
무릎이 살짝 튀어나온 초록색 트레이닝복 바지, 짝이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한 연회색 티셔츠 차림의 형석이었다.
“웬일이야? 이 동네에 다 납시고.”
“너야말로 왜 거기서?”
“떡볶이집에 왜 있겠어. 떡볶이 사가려고 왔지. 여기 우리 집 30년 단골가게야. 근데 이 분은 누구? 혹시?”
“형석이니?”
“이은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어머, 반갑다. 20년 지났는데도 옛날 얼굴이 많이 남아 있다, 넌.”
“아이고, 그때 보단 많이 사람 됐지. 잘 지내고 있다고 현준이 통해 소식은 들었어.”
“응, 그냥 평범히 나쁘지 않게 지내고 있어.”
은설이 말하는 ‘평범히’의 뜻을 형석이 금방 알아 들었다.
“평범히 지내는 게 제일 어려운 거야, 나 봐, 아직도 엄마 밑에서 떡볶이 심부름이나 하면서 지내고 있잖아. 아줌마, 모두 얼마라고 그러셨죠?”
형석은 은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제 할 일을 잊지 않고 해결했다. 돈을 찾느라 주머니를 뒤지는 손 때문에 형석의 트레이닝복이 이리저리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주섬주섬 만 이천 원을 추려서 주인아주머니께 건네며 형석이 현준에게 말했다.
“먹고 가는 거지? 내 거도 같이 시켜놓고 있어. 난 이것만 엄마 좀 갖다 주고 올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형석은 이미 종종거리며 뜀박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저어 기, 이불집 간판 보이지? 저기가 형석이네 집이야. 이불집이 어머니가 하시는 가게고, 위가 집. 형석이는 아직 이 동네 살아.”
상황 설명을 무어라도 해 주어야 할 것 같은지 현준이 은설에게 형석의 집 위치를 설명했다.
“그렇구나. 아는 사람 아무도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아직 여기 계속 살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네.”
현준과 은설이 분식집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즉석떡볶이 3인분에, 모둠튀김 대 사이즈, 순대, 계란 세 개 주시고요, 순대꼬치랑 떡꼬치도 주세요.”
“순대꼬치 아직 파는 거 보고 속으로 좋아라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너 여기 떡꼬치도 좋아했었어. 여기 거만 맛있다면서. 다른데선 안 사 먹어도 여기선 종종 사 먹었잖아, 순대꼬치 없는 날.”
“내가 그랬어?”
“먹어 보면 생각날 거야, 아마.”
음식은 아주 금방 나왔다. 한상이 떡 부러지게 차려졌고, 은설이 제일 먼저 순대꼬치를 집어 들었다.
“어떻게 먹어야 되지?”
은설이 잠시 망설이더니 나누어 먹으려는 듯 순대꼬치를 꼬치에서 빼내려고 했다.
“그냥 한 입 크게 베어 물어. 그래야 맛있지.”
“그럴까?”
현준의 훈수에 용기를 얻은 은설이 수줍게 웃으며, 순대꼬치를 크게 한입 ‘앙’하고 물었다.
“어때?”
현준의 물음에 은설이 대답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한참을 우물거린 끝에야 순대꼬치 한 입을 삼킨 은설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하나도 안 변했네. 맛있어.”
은설의 반응에 현준이 세상 더 없을 뿌듯함을 머금은 표정을 지었다.
“너도 한 입 줄까?”
은설이 순대꼬치를 내밀었다. 순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현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빼어 순대 한 입을 받아 물었다.
“맛있어. 이제 너 다 먹어. 좋아하던 거였잖아.”
“응. 다 먹을래. 진짜 맛있어.”
현준은 성숙했던 은설의 말투에 생긴 미묘한 변화를 알아챘다. 은설은 정말로 14살 시절로 돌아간 듯 보였다.
“이렇게 종류별로 한 상 차려 먹는 게 쉽지 않았어. 친구가 5명은 모여야 가능한 일이었는데.”
“많이 먹어. 다 사줄게.”
“이거 내가 사주기로 하고 온 거잖아.”
“맞다. 아, 이런 어떡하지. 형석이 것까지 시켜버렸는데.”
“형석이 것도 사줄 만큼은 돈 벌어 나. 걱정하지 말고 먹어. 오늘은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은설이 장난스레 돈 자랑을 했다.
후닥닥 푸닥닥거리며 형석이 떡볶이집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아, 엄마랑 이모들이 자꾸 튀김 먹고 가래서. 집 빠져나오는 데 오래 거렸어.”
“더 있다 와도 되는데. 먹고 오지 그랬냐.”
“분식은 자고로 분식집 안에서 먹어야 제일 맛이 있는 거야, 그렇지 은설아?”
“응, 하하.”
형석의 넉살에 은설의 웃음이 ‘빵’하고 터졌다. 떡볶이를 먹으면서는 하하 호호하는 웃음과 함께 은설과 형석의 잘 지내었느냐, 뭐 하고 지내느냐는 인사가 주로 오고 갔다. 본래의 의도와 달라진 학교 앞 데이트에 현준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유머러스한 형석과의 대화가 은설의 기분은 풀어주고 있는 듯 보여 그냥 이대로도 은설에겐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뭐 시간도 길지 않은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좀 묻자. 은설아.”
내내 유쾌하던 형석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를 내며 은설에게 말했다.
“뭐를?”
“수지 소식 아니? “
“니가 좋아했던 수지 묻는 거지?"
“응. 응? 알고 있었어?”
“응, 실은 나랑 수지 둘 중 하나라는 것까지만. 근데 이렇게 묻는 걸 보니, 수지였던 게 맞나 보네.”
“응, 내가 걔 간식 무진장 많이 사줬었다.”
“알아, 덕분에 나도 많이 얻어먹었어.”
“그런 의미에서 수지 소식 좀 전해주지 않으련?”
“남편 하고 같이 태국 나가서 살고 있어. 남편이 주재원으로 파견 됐거든. 몇 년 더 있어야 들어올 수 있대.”
“아, 태국. 결혼을 했구나.”
“응. 좀 일찍. 실망스러운 소식이라 어떡해.”
“아니야. 여자 동창 중엔 이 나이까지 결혼 안 한 사람이 더 드물어서 예상은 하고 있었어. 첫사랑이 다 그렇지 뭐. 하하. 입맛이 없네. 남은 떡볶인 너네가 다 먹어라.”
이런저런 추억담을 나누며 떡볶이집 만찬을 즐기는 동안 은설은 한 번도 난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현준과 함께 있으면 이제는 14살의 추억보다 난임이 더 많이 떠올랐지만, 학교 앞 떡볶이집이라는 장소와 옛 친구 형석 덕분인지 온전히 추억에만 빠져 있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