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볶음밥에 후식 냉면까지 먹고 나서야 세 사람은 포크를 놓았다.
“후아! 배가 터질 것 같아.”
은설이 오래간만에 기분 좋은 탄성을 내질렀다.
“실력이 녹슬지 않았어, 다들. 셋이서 7인분은 먹은 거 같다. 다음엔 김치부침개에 돈가스까지 달려보자고. 응? ”
형석이 남은 음료수를 거두어 마시며 오늘의 만찬을 정리했다. 먹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현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처에 산책할만한 곳 없니? 소화를 좀 시켜야 할 거 같아.”
“학교 운동장 가로질러서 후문으로 나가면 도서관 가는 길로 연결 돼.”
아직 동네 주민인 형석이 은설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을 했다.
“어머, 그래? 원래 그랬었나? 기억이 잘 안 나.”
“그땐 그 길이 없었지. 그쪽으로 아파트 단지 들어서면서 생긴 길이니까.”
“하긴. 예전엔 전부 주택이나 빌라뿐이었는데. 지금은 언뜻 돌아봐도 단지가 서너 개 이상은 되는 거 같아. 동네 외관도 많이 변했어. 학교도 그렇고.”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 까지도 대화는 주로 은설과 형석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몇 년 전에 이 동네가 환경정비사업 같은 걸 했어. 그때 웬만한 공공건물은 싹 다 손을 댔는데 제일 많이 바뀐 데가 우리 중학교였지, 아마.”
“그랬구나. 깔끔해져서 훨씬 보기가 좋긴 한데 추억 속의 그 학교는 이제 아니네.”
미소를 짓고 있는 은설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은설이 운동장 한 편의 철봉대로 자리를 옮겼다. 가장 낮은 철봉 위에 양팔을 올리고선 은설은 넓게 펼친 시야로 운동장 풍경을 감상했다. 여름 저녁의 붉은 땅거미가 운동장에 내려앉고 있었고, 마치 14살의 여름이 엊그제처럼 느껴졌다. 그 무렵처럼 은설의 옆엔 현준과 형석이 있었고, 속에서 슬그머니 올라오는 떡볶이의 맵달한 기운까지도 열네 살의 즐거운 한 때를 기억하게 했다. 오늘과 그날 사이에 있었던 20년의 고된 시간이 찰나인 듯 무색하게 느껴졌다.
은설이 한창 감상에 빠져있는 동안 현준과 형석은 요즘도 종종 그러했던 것처럼 등나무 벤치에 앉아 잔뜩 부른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농구공 가지고 나올걸. 밥 먹고 한 판 뛰면 딱인데. 골대 비어 있는데 아깝다. 시험 때라 그런가?”
“배 아파. 잔뜩 먹고 뛰면. 지금이 애들 시험 때야? 이렇게 늦게 봤었나?”
“대학생보다 한 달 늦잖아. 애들은.”
“그랬나. 다 잊었어.”
“이은설 말곤 다 삭제지? 하긴 뭐 그 머리에 넣어 놓고 살게 많으니, 안 중요한 건 잊어야지. 그래야 정신이 건강한 상태로 살 수가 있는 거라고.”
“이 자식, 분명히 잘 나가는 상담사가 맞는데 이상하게 니 입에서 나온 말은 다 믿음이 안 가.”
“나도 인마 너 돌팔이처럼 보여. 어차피 나는 너한테 진료받을 일 없으니까 뭐 상관은 없지만.”
장난스럽게 투덕이이기를 몇 차례 더 주고받다가 현준이 본심을 꺼내었다.
“너 안 가냐?”
“왜? 오랜만에 이은설 만나서 나도 반가워, 인마. 너만 동창이냐? 나도 쟤 동창이야.”
형석이 살짝 이죽이며 현준을 놀리듯 말했다. 계획했던 것들이 어긋나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현준의 표정이 난감하게 변해가는 것을 형석이 금방 알아보았다.
“걱정 마, 새꺄. 데이트 마무리할 짬은 줄 테니까. 근데 그전까진 계속 졸졸 쫓아다닐 거야. 왜냐면······.”
“왜?”
“나는 미주 씨 편이니까. 은설아! 가자! 도서관 쪽으로오!!”
현준이 무어라 대꾸할 새를 주지 않으려는 듯 형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은설이 있는 철봉대 쪽으로 달려갔다. 은설에겐 후문 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을 하고, 현준의 향해서는 어서 오라는 듯 형석이 손짓을 했다.
“종일 잊고 있었네, 미주."
미안함이 몰려왔다. 생일날 저녁, 미주를 먼저 흔든 것은 현준 자신이었다. 그래놓고는 하루 종일 까맣게 잊고 지냈다니. 현준은 형석이 자신의 머릿속을 훤히 꿰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머릿속을 일부러 뒤흔든 게 분명한 형석이 고마우면서도 얄미웠다. 굳이 지금 그럴 것 까지야. 그렇다 해도 지금 당장 현준의 위로가 필요한 것은 은설이 분명했다.
“미친놈.”
현준이 스스로를 향해 짧게 욕 한마디를 내지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일단은 은설에게 가야 했다. 은설을 불러낸 것도 현준 자신이었으므로.
“도서관 쪽으로 가자길래, 예전에 자주 가던 편의점엘 가려는 줄 알았더니.”
은설이 한강둔치만큼 가깝게 펼쳐진 카페 한강뷰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사람들이 명당자리를 귀신같이 알아보더라고. 도서관 하고 편의점만 두기엔 아까운 자리긴 하지. 여기 도서관 자료실에 뷰 끝내주던 자리 생각나지? 거기 요즘도 앉으려면 아주 박 터져.”
형석은 함께 있는 내내 동네의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설명을 해댔다.
“아직도 도서관 종종 다녀?”
“책 보기 좋잖아. 야, 내가 좀 실없어 보여 그렇지. 나름 길게 공부했어. 책도 읽고 그러고 사는 사람이야.”
형석이 장난스레 발끈했다.
“믿음이 좀 안 가게 생기긴 했지. 그런데도 심리상담사로 꽤 잘 나가는 거 보면 신기해.”
현준이 험담 같은 칭찬으로 형석을 두둔해 주었다. 은설이 알고 보니 대단한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한껏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심리상담하는구나! 옛날 얘기 하느라 바빠서 어떤 일 하며 지내는 지도 못 물어봤네. 주로 어떤 사람들 대상으로 상담해?”
“상담소 위치가 학교 앞이라 주로 청소년상담이 많긴 한데, 가족상담도 하고, 개인심리상담도 하고 다 해. 혹시 남편하고 뭐 문제없니? 있으면 연락해. 싸게 상담해 줄게.”
“하하, 지인 할인 되는 거야? 상담도 받으려면 비용이 꽤 비싸던데, 땡큐. 근데 아직 신혼이라 그런가 상담받을 만큼 큰 문제는 없네. 나중에 생기면 갈게. 하하.”
아직은 신혼이고 남편과는 별 문제가 없다는 은설의 말에 형석이 현준에게 그것 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현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형석의 시선을 외면했다. 형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지갑을 찾으려는 듯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그래, 뭐. 잘해주려고 했는데 문제가 없다니 아쉽구만. 문제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명함 줄게. 앗, 지갑. 안 들고 나왔네.”
“명함은 안 줘도 괜찮아. 학교 앞이면 어디?”
은설이 웃으며 정중히 명함을 사양하고, 대신 상담사무소의 위치를 물었다
“나루중학교 앞.”
“이 자식 3층에서 2층으로 출근해.”
“우리 엄마보다 내가 출퇴근 동선이 좀 더 짧긴 하지. 우리 엄마는 1층으로 출근하거든.”
“아, 이불집 위가 니 상담소였구나.”
“봤어?”
“응. 아까 현준이가 알려줘서. 이불집 있는 건물로 네가 들어가는 거 봤어.”
“하아, 하루라도 빨리 사무실 이사를 해야 하는데.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내담자들한테는 그렇게 독립을 외치면서 정작 나는 엄마 그늘 아래 너무 오래 있었어.”
“사무실 옮길 생각은 있는 거야?”
현준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형석의 진짜 의중을 물었다.
“계속 알아는 보고 있었어. 오다가다 만나는 인연을 꿈꿨는데 주중에 내가 오가는 길은 우리 집 계단이 전부잖아.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 장가가려면 독립부터 하는 게 순서가 맞아. 이 봐, 맨날 붙어 지내니까 삼십 대 중반이 다 된 아들내미 저녁나절에 사라졌다고 집에서 전화가 걸려오고 그러잖아, 지금.”
때마침 걸려온 전화 벨소리에 맞춰 형석의 휴대전화 액정에 곱게 나이 든 중년 여성의 얼굴이 떴다.
“엄마? 우유? 계란하고 빵? 내일 아침 메뉴가 토스트야? 알겠어요. 도서관 앞. 친구 좀 만나러. 네. 아냐, 금방 들어갈 거야. 네.”
어머니와 짧은 통화를 마친 형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김여사 찾으신다. 들어가 봐야겠다, 나는. 은설아 커피는 현준이가 쏠 거야. 담에 볼 땐 내가 꼭 사는 걸로. 그러자고, 응?”
“그래, 알았어. 담에 반드시 꼭 또 봐.”
시종 유쾌했던 형석은 다시 보자는 말도 유머러스했다. 몇 시간 사이 형석에게 적응한 은설도 제법 호응을 맞춰 작별인사를 했다. 형석이 가고 난 후 현준과 은설 사이에 평화로운 침묵이 잠시 흘렀다. 은설은 감상에 젖은 듯 창 밖의 한강 야경을 즐겼고, 현준은 그런 은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평화롭네.”
은설이 먼저 혼잣말처럼 말문을 텄다.
“그러게 형석이가 썩 괜찮은 곳으로 안내를 했어.”
“그러게. 고맙게도. 너도 고마워. 네 덕에 정말 오래간만에 아무 생각 않고 즐거운 시간 보냈어.”
“형석이가 다 했어. 내가 계획했던 건 떡볶이집에 간 것 말고 한 게 없어.”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현준을 얼굴을 바라보며 은설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동네에 다음에도 또 오면 되지, 뭐.”
“다시 올 수 있겠어?”
현준이 안쓰럽고 걱정스러운 눈빛이 되어 말했다.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은설이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응,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