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당신 바봅니까?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내색 않느라 힘들었겠네요. 이은설."

"?"

"난임이라는 상황이 야기하는 스트레스가 남자들의 상상 이상으로 큽니다."

"알죠. 그건."

현준이 내뿜는 기세에 순간 압도된 준수가 목소리 톤을 현준보다 조금 낮췄다.

"가뜩이나 힘든데 거기에 과도하게 작용하는 호르몬의 영향까지 더해지는 거예요. 환자에게 스트레스를 조절할만한 여력이 남아 있질 않죠. 한마디로······."

"······."

"인공수정 진행되는 동안만이라도 은설이에게 잘 해주시라고 남편분께 말씀드리는 겁니다.”

현준이 친정오라버니라도 되는 것처럼 준수에게 엄포를 놓았다.

난임치료라는 엄청난 과제 앞에서 자신보다 존재가 작아질 수 밖에 없는 당신의 상황을 파악하라는 듯이.

······. 은설씨 좋아합니까? 아직도?”

다짜고짜 준수가 현준에게 말펀치를 날렸다.

“네?”

어안이 벙벙해진 현준이 준수에게 되물었다.

“시간 없어요. 빨리 대답해요. 은설씨랑 여기 간호사 돌아오기 전에.”

현준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하는 것이 준수의 눈에 들어왔다.

‘기선제압 성공.’

남편과 남편이 아닌 남자. 이런 관계에선 준수 쪽에 훨씬 더 힘이 실리기 마련이었다.

“혹시 의처증 있어요?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의처증이라니. 말 조심해요. 나에겐 은설씨를 의심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당신을 의심할 뿐이지.”

······.

“촉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그 촉이 왔단 말입니다.”

“당신 촉이 맞다면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허, 참. 거 사지육신 멀쩡한 양반이 왜 남의 마누라를 좋아하고 난리입니까?”

“남의 마누라 이전에 내 첫사랑이었습니다.”

“아, 당신이 그놈이었구만!”

이제야 아귀를 맞추었다는 듯 준수가 소리를 높였다.

“20년도 넘은 고릿짝 첫사랑을 못 잊고 이러는 겁니까, 지금?”

“뭘 이런다는 거죠?”

현준이 되물어오는 말에 준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그러니까 이 의사는,

난임진료를 하고 있었다.

다른 병원에 갔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어떤 의심을 아무렇게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설이 진료하는 데에 있어서 만큼은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말입니다. 함부로 말 내뱉지 마세요.”

현준의 목소리는 엄격하고 근엄했으며 진지했다.

“당신이 느꼈다는 그 촉을 굳이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20년 전 감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 역시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분노를 누르고 있는 것인지 두려움을 감추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현준의 떨림이 준수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소식이 끊기고도 오래도록 변치 않았던 내 마음과 의사로서 내가 하고 있는 진료는 별개라는 것만큼은 잊지 마십시오.”

"······."

말을 마친 후에도 현준의 눈이 계속 이글거렸다.

······. 당신 바봅니까?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 아기를 품도록 돕다니.”

비아냥이 아니었다.

준수의 목소리 톤으로 현준도 그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말했잖습니까. 한 인간으로서 내가 갖는 감정과 내가 행하는 의료행위는 별개라고.”

준수는 촉이 발달한 남자였다.

적어도 상대방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는 확실히 구분할 줄 알았다.

“이 새끼, 또라이네.”

준수가 나직이 욕지거리를 하며 현준을 응시했다.

“뭐라고요?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준수의 말을 도발로 받아들인 현준이 싸울 채비를 하려 들었다.

“얌마, 너 은설씨랑 동창이랬으니까 톡 까놓고 형이 딱 한마디만 할게."

'형'이라는 말에 현준이 움찔하며 멈췄다.

"이 자식아, 너 그렇게 불쌍하게 살지 마. 모자란 것 하나 없이 산 티가 팍팍 나는 놈이 뭐가 아쉽고 모자라서 20년 묵은 소싯적 감정에 매달려 여태 그러고 지내냐?"

"······."

"안 말려. 형이 너 안 말린다. 혹시 은설씨가 너를 뭐 좀 따로 만나더라도 눈 감을 거야. 은설씨 믿으니까. 그리고, 너! 너도 좀 믿을 란다. 딱 봐도 또라이야, 너. 진짜 또라이."

생각지 못한 준수의 말에 현준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햐, 참. 별 놈 다 보네. 의사 중에 또라이 많단 소린 들었다만.”

투덜거리는 준수의 목소리 위로 현준이 나직이 질문을 얹었다.

“진료는······.”

“당신한테 받으라며요. 그 또라이 같은 소원 들어 줄테니 은설씨하고 내 애 좀 잘 좀 만들어 보슈. 하, 참. 이해 안 가 , 이해 안 가.”




세차게 도리질을 해대며 준수가 환자용 의자에 털썩 몸을 주저 앉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정간호사와 은설이 주사실에서의 볼 일을 마치고 다시 진료실로 돌아왔다.

한댓거리를 마친 현준과 준수 모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어머, 진료실 너무 더웠나봐요. 산모들도 들어오는 방이라 냉방을 좀 약하게 했더니. 아님 에어컨이 고장났나? 아닌데. 시원한 바람 나오는데······.

정간호사가 재빨리 에어컨 상태를 체크했다.

현준과 준수의 상태를 차례로 살핀 은설은 범상치 않은 둘의 눈치를 보며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현준의 진료실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정리할 키 역시 현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한 번 더 말씀 드립니다. 남편 분 아내 분 한테 잘 해주세요. 평소보다 좀 예민하고 날카롭게 신경 곤두세우더라도 많이 이해해주시고요."

"예예. 그래얍죠."

준수가 골이 난 목소리로 건성건성 대답을 했다.

"은설이는 시간 맞춰 약 먹고 주사 놓는 거 절대 잊지 말고. 주사 혼자 놓을 수 있겠어?”

“응. 간호사 선생님이 친절히 잘 알려주셨어. 혼자 놓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하다 잘 안 되면 바로 연락하고.”

“집 가까우니까 바로 병원으로 오면 되겠네. 내가 데려다 줄 테니까 주사 걱정은 말아요, 은설씨.”

선은 분명해야 했다.

은설 옆 가장 가까이에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준수가 더없이 자상한 남편 모드가 되어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젊은 시앗이 눈꼴시어 남편 곁이 빌 틈 없도록 애쓰는 못난이 조강지처 같단 생각이 들었다.

땀 때문인지 짜고 쓴 맛이 도는 침을 삼키며 현준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새로 든 시앗에게 안방을 빼앗긴 마님의 심정이 100퍼센트 이해가 될 것만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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