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남편 VS 의사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

by 이소정

은설을 호명하는 정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먼저 들어갈게. 이따 내가 들어오라고 하면 준수 씨도 진료실로 들어와요.”

준수가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은설이 총총한 걸음으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이 덩그마니 남겨진 준수는 어쩐지 기분이 착잡했다.

‘의사가 나루중학교 다닐 때 알던 남자 동창생이란 말이지.’

준수는 은설의 초등학교 졸업앨범에서 보았던 그 무렵의 은설을 떠올렸다.

초등학생 치고는 성숙했고, 제법 예쁘장했다.

‘6개월쯤 더 자란 후일 테니 아마도 조금 더 아름다운 태가 났었겠지.’

녀석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을 은설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다가 준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까지 요염하진 않지, 중 1이.’

자꾸만 폭주하는 머릿속 상상을 진정시키려고 준수는 소파 옆 책꽂이에 수북이 쌓여있는 병원 잡지를 꺼내 들었다.

볼 것 참 없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마구 넘기는데 은설에게서 들었던 이름이 준수의 시야로 꽂혀 들어왔다.

현준의 인터뷰기사였다.

준수는 잡지 한 면을 가득 채운 현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자식. 잘 생겼잖아.’

의사 가운을 입고 있어도 가려지지 않는 세련미가 있었다.

잘 다듬어진 구레나룻과 딱 봐도 비싼 데서 자른 티가 나는 헤어스타일.

샤프한 턱선과 다부진 어깨, 곧게 뻗은 눈썹 아래에 적절한 간격을 두고 배치된 또렷한 이목구비.

눈엔 준수처럼 쌍꺼풀이 없었다.

‘은설 씨 이상형이 쌍꺼풀 없이 큰 눈을 가진 샤프한 남자인데.’

준수가 무의식 중에 뱃살에 힘을 주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바지 단추가 배꼽 깊숙이 먹혀들어갔다.

파고드는 고통에 아래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준수가 놀란 듯 셔츠를 당겨 벌어진 단추 사이의 매무새를 다듬었다.

'돼지가 따로 없구만.'

흐릿해진 준수의 시야에 결혼 초 진지하게 체중조절을 권하던 은설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의 동시에, 원래 결혼은 이상형과 정반대인 사람하고 하는 거라며 낄낄거리면서 뱃살 위로 북을 치던 자신도 떠올렸다.

‘미련한 놈. 그때부터 살을 뺐으면 지금쯤 68kg 정도밖에 안 나갈 텐데.’

동창이라는 의사 나부랭이가 어떤 놈인지 알기 위해 준수는 현준의 인터뷰기사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지만, 편집자에 의해 몇 번이고 다듬어졌을 잡지 기사에선 좀처럼 현준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사진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까탈스러움조차 인터뷰기사에선 감춰진 듯했다.

‘이런 자식들 치고 목소리 좋은 놈을 본 적이 없는데. 은설 씨 취향은 맑고 청명한 느낌이 나는 중저음이지. 나처럼.’

급기야 직접 귀로 듣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현준의 목소리까지 폄훼하며 혼자서 붉으락푸르락하고 있는데, 준수를 부르는 은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수 씨, 들어와요.”

보고 있던 잡지를 팽개치듯 책꽂이에 던져 놓고 준수가 성큼성큼 진료실로 들어갔다.

은설이 전에 없이 나긋한 목소리로 서로를 소개했다.

“내가 맨날 얘기했던 우리 신랑. 준수 씨, 내가 말했던 중학교 동창 의사 선생님이요.”

준수도 현준도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어쭈, 이 쉐키. 은설 씨랑 동갑이라며. 형님 보고 인사도 안 하는 거냐? 이 쉬키야, 너 알잖아. 내가 형인 거.’

준수가 잔뜩 눈에 힘을 주며 현준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현준 쪽에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애피타이저 같은 신경전에서 승리한 기쁨을 만끽하며 준수가 현준의 악수에 응했다.

곧 맞잡은 두 손 위에 중후한 현준의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류현준이라고 합니다.”

목소리마저 좋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던 준수의 얼굴에 묘한 패배감이 흘렀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것에서는 현준에 비해 내세울 것이 하나 없는 준수의 완패였다.

준수의 표정을 읽은 현준이 자기소개를 덧붙였다.

“은설이 주치의고, 아시다시피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20년 지기 친굽니다.”

준수는 현준이 일부러 은설과 아주 오래된 인연임을 강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언변만큼은 밀리고 싶지 않았던 준수가 도전적인 현준의 인사를 맞받아쳤다.

“아, 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6개월 정도 다녔던 중학교에서 같은 반이셨다고요."

'6개월'을 말할 때 준수의 목소리 톤이 가장 높이 올라갔다.

"꼬꼬마 시절 잠깐 본 인연인데 친구라고 이렇게 우리 은설 씨 잘 챙겨주셔서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편.으.로.서.”

현준의 입에서 쓴웃음이 흐르는 것을 본 준수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현준이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으로 인사말 배틀을 마무리 지으며 소심한 복수의 멘트를 날렸다.

“오늘 남편분은 안 오셔도 됐는데. 미리 안내를 좀 할 걸 그랬네요. 헛걸음하시게 해서 죄송해서 어쩌나.”

의자에 막 엉덩이를 붙이려던 준수가 고개를 쳐들어 현준을 한번 째렸고, 현준은 못 본 척하며 인공수정 시술 과정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은 이은설환자 피검사만 진행합니다. 두 분 다 최근에 난임검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추가적인 검사는 필요 없어요. 클로미핀에 대한 반응성이 좋아서······."

"클로미핀이 뭔가요?"

"······. 이은설 환자가 복용하는 호르몬제요."

"아."

"남편들이 보통 약 이름 정도는 외우던데."

기회를 잡은 현준이 드높아진 준수의 콧대를 내리찍었다.

"인공수정 과배란 역시 클로미핀으로 진행할 거예요. 거기에 폴리트린 주사 처방이 더해질 겁니다. 들어 봤지? 배주사."

"응."

다부진 목소리로 은설이 짧게 대답을 했다.

"이따 간호사 선생님에게 주사 놓는 법 잘 배워 가. 정간호사, 이은설 환자 주사실로 안내 부탁해요. 남편분은 저하고 잠깐 더 이야기하시죠.”

정간호사가 은설을 데리고 진료실 밖으로 나가고, 현준과 준수가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보는 눈이 사라지자 두 사람 사이의 눈빛이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이야기하시죠.”

준수가 별것 아닌 멘트를 몹시도 강한 어조로 현준에게 날렸다.

준수에겐 낯선 공간이었고, 더구나 현준의 진료실이었다.

의사와 환자라는 입장의 차이도 둘 사이의 역학관계에 있어서 준수에게 불리한 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준수의 긴장을 눈치챈 현준이 일부러 한껏 여유로운 톤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 의사입장에서 남편 되시는 분들께 일상적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준수의 표정이 알쏭달쏭해졌다.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이 진행되는 동안은 어찌 보면 호르몬이 비정상적인 상태로 한 달 가까이 유지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만큼 환자가 예민하단 얘기지요."

"그거야 뭐 무진장 잘 알고 있죠."

'예민'이라는 단어에 준수가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고 있다는 듯 반응을 했다.

"과도한 호르몬 때문에 1차적으로는 신체 상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요. 더 중요한 것은 환자의 불안정한 심리상태입니다."

"워낙 차분한 사람이라 그런 적 없어요."

준수를 향한 현준의 시선에 순간 날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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