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은설과 준수는 각기 다른 이유로 말이 없었다.
라디오에선 며칠 째 계속되고 있는 국지성 호우에 대한 주의보가 흘러나왔다.
차창을 때리는 굵은 빗줄기 틈으로 은설은 바깥 풍광만 연신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직이 콧노래도 부르는 듯했다. 들릴 듯 말 듯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하며 간간이 허밍 소리가 들렸다.
“은설 씨는 기분 좋은가 보네.”
툭 하고 던진 말에 담긴 준수의 고된 감정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응.”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흘끔 보았을 뿐이었지만 대답을 하는 은설의 얼굴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명절 이후로 우울감이 더 심해 보였던 은설의 얼굴에 어쨌거나 오래간만에 핀 웃음이었다.
준수가 말투를 조금 더 누그러뜨리며 은설에게 다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그냥 다. 일단 처음으로 준수 씨랑 같이 진료를 본 것부터 마음이 든든하고 좋았어."
"별 게 다 좋네."
"별 거라니. 남편하고 손잡고 나란히 진료받으러 온 여자들 보면 사실 조금 부럽기도 했단 말이에요."
은설의 말에 현준의 표정이 조금 미안해졌다.
"그리고······."
"그리고?"
"현준이가 남자동창이라 준수 씨가 계속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막상 진료 볼 땐 분위기도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아."
"나 주사실에 가 있는 동안 둘이 무슨 얘기했어?”
“별 얘기 안 했어. 의사랑 보호자 사이에 할 얘기가 뭐가 있어. 그냥 주의사항 좀 알려주고······."
"주의사항?"
"호르몬 치료라 예민할 테니까 잘해주라 그러고. 뭐 그런 거. 아까 은설 씨도 좀 들었잖아. 그게 다지, 뭐.”
준수는 결국 ‘어째서 현준이 중학교 시절의 그 첫사랑이었단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며 은설에게 따지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운전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했던 고민들이 무색해졌다.
반짝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밝게 웃는 은설의 미소 앞에서는 한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은설에게 오래간만에 찾아온 마음의 평화를 해치고 싶지 않았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히려 은설 쪽이었다.
“현준이 어떤 거 같아?”
“내 친구도 아닌데 이러고저러고 판단할 게 뭐 있나.”
“준수 씨 마음에 안 들면 병원 바꾸자 할 거랬잖아요.”
“다녀요, 그냥. 의사가 뭐 다 똑같은 의사지.”
준수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체를 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실은 준수 씨한테 한 가지 더 얘기 안 한 게 있어.”
“······."
준수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이 많은 편인 준수답지 않게 아무런 궁금증이 없는 표정이었다.
평소와 다른 준수의 모습을 은설은 조금 의아해했다.
“안 궁금해?”
“뭔데?”
“실은 말이야······.”
먼저 말을 꺼내고 준수의 반응도 재촉을 했으면서 은설은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뭔데 그래?”
준수가 한 번 더 묻자 은설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현준이 실은 내가 처음 사귀었던 남자친구였어.”
“응."
“안 놀래네. 기분 나빠할 줄 알고 엄청 걱정했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표정에 미동조차 없는 준수를 보며 은설이 조금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설 씨, 엄청 걱정한 사람치고는 아까부터 기분이 너무 좋아 보이던데.”
“걱정은 지난 반년 가까이 계속했던 거고요. 기분은 오늘 병원에 같이 다녀온 후부터 좋아진 거고요. 그래서 용기 내 가지고 이렇게 준수 씨한테 말도 하고 그러는 거고요.”
“중학교 1학년 동창이라며. 그때 한 연애가 연앤가, 뭐.”
준수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렇긴 하지. 초등학교 졸업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어린애들 소꿉장난이긴 했지.”
“그 정도 여친은 나도 있어. 이래 봬도 내가 초딩 4학년 때부터 여자애들한테 대시도 받고 그랬던 사람이야. 동창 모임 가면 나더러 사귀자 했던 애들이 쭈르륵 줄 지어 앉아 있고 그랬었다고.”
“애들 누구?”
“······. 지금은 다 연락 안 하지. 걔들 시집가고 나서 끊겼어.”
“치.”
은설이 '그럼 그렇지' 하는 듯한 뉘앙스의 콧방귀를 뀌었다.
“암튼 준수 씨가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내가 우리 신랑을 이렇게 또 조금 알아 가네."
"······."
"나보다 훨씬 쿨한 사람이야, 자기가."
"쿨병이 원래 지 발등에 도끼 꽂는 병인데."
"왜요? 도끼 꽂은 기분이야, 지금?"
"몰라.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니까 쿨하다고 몰아가지 말아."
"······. 병원 바꿀까?"
"다녀, 그냥. 그 자식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한다며."
"미안. 애기 만드는 데 미쳐서, 결국은 현준이한테 진료받기로 하긴 했는데. 울 신랑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건 아닌가 내내 걱정했었어요.”
은설이 이제야 모든 걸 털어놓아 속이 후련하다는 듯 그간의 조마조마했던 심정을 준수에게 털어놓았다.
"현준이한테 진료받는 거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
준수의 입에선 '고마워'에 대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혀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질문들을 내뱉지 않기 위해 그저 앙다문 입술로 고군분투할 뿐.
‘은설 씨는 정말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현준인가 뭔가 그 자식 봐도?’
준수는 차마 이 말들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어떤 대답을 듣게 되더라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전혀’라는 대답을 원하지만 듣는다고 한들 백 퍼센트 믿을 자신도 없었다.
한번 내뱉은 이 질문은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고 그렇게 정말 자신이 의처증 환자가 될 것만 같았다.
고지식한 은설이 어쩌면 사실대로 고백을 할 수도 있었다.
현준을 아직도 사랑한다고.
이런 말은 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
준수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그 현준이라는 친구는 아직도 은설 씨 좋아하는 거 같던데. 알고 있어?”
“뭐?”
은설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왜 웃어?”
“아, 웃겨서. 준수 씨 정말로 나 사랑하는 거 맞구나. 내가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거야?”
“무슨 말이야, 그게.”
애써 생각을 짜내어 던진 질문인데 오히려 실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준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은설이 얼른 기사 하나를 검색해서 차가 신호에 멈춘 틈을 타 준수에게 보여 주었다.
“뭔데? ”
“이산병원 이사장 딸내미 이혼 기사.”
“그걸 왜 보여줘?”
“여기 쓰여 있는 이혼한 의사 남편 류모씨가 바로 현준이야.”
“그래? 이혼남이었어?”
“응, 그것도 대기업 수준의 병원 이사장 딸내미하고 결혼했다 갈라 선."
"미친놈이네. 그 자리를 왜 박차고 나오냐? 왜 이혼했대?"
"몰라요, 나도."
"다음번에 진료 보러 가면 물어봐 봐. 궁금해 죽겠네."
"그런 걸 어떻게 물어봐. 진료받다 말고 '근데 너 왜 이혼했냐?' 뭐 이렇게 물어봐?"
"궁금해 죽겠어서 스트레스 너무 심하게 받고 있다고 그래 봐."
"말도 안 되는. 암튼! 이렇게 이야기하면 자존심 좀 상하지만 걔는 우리하고 다른 레벨의 세상을 살고 있다고."
"그렇긴 하겠구만."
"그런 애가 뭐가 아쉬워서 나를 아직도 좋아하나? 눈 한 번만 돌리면 주변에 젊고 이쁜 사람들이 수두룩 빡빡하니 진을 치고 있을 텐데."
은설이 어이가 없는 상상이라는 듯 말했다.
“첫사랑이잖아! 아련했겠지.”
“첫사랑이면 뭐 해. 남편하고 애기 좀 만들게 도와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아줌마인데.”
“자기가 왜 아줌마야? 아직 아줌마 아니야.”
“우리 신랑 눈엔 진짜 내가 아직도 꽃띠인가 보네, 고마워요. 신랑.”
은설이 말꼬리를 올리며 다정스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