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준수는 새삼 은설과 만나던 초창기를 떠올렸다.
적지 않은 나이에 소개팅을 해서 만난 사이이면서도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는 것만 4개월을 넘게 했다.
직업 때문인지 고지식한 면도 있어서 그깟 손 한번 잡는 것이 뭐라고 준수의 애를 적잖이도 태웠었다.
사귀자 하지 않았으니,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 않냐는 통해 부랴부랴 목걸이를 사다가 ‘당신과 사귀고 싶습니다’하며 정식으로 교제 요청을 하고서야 은설은 마음을 열었다.
‘세상 이렇게까지 무딘 사람이 잘 없긴 하지.’
“그래도 조심해. 사람 좋아하는데 레벨이 어딨나. 이혼남이라며. 외로워서 은설 씨한테 더 꽂힐 수도 있어.”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여자라면 지긋지긋할지도 몰라.”
“이혼기사는 또 언제 검색해 봤어?”
“난임 쪽으로 유명하대니까 한번 검색해 봤지. 근데 결혼기사 이혼기사 다 나오더라고. 그래서 알았어. 그렇게 부잣집에 장가갔었는지.”
“그 친구네 집도 좀 살긴 살았나 보네.”
“응. 동네 유지 정도는 됐던 거 같아. 현준이네 부모님 두 분 다 의사 선생님이었거든."
"졌다. 금수저네."
"금수저까진 아녔어. 여유로워 보이긴 했지만. 기분이 참 이상해. 20년 전엔 분명 한 동네 살던 고만고만한 친구들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까지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지.”
은설의 말을 듣던 준수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의사 할걸. 그럼 은설 씨도 의사 마누라 소리 들으면서 떵떵거리고 살았을 텐데.”
내내 앞만 보며 말하던 은설이 고개를 돌려 준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준수의 표정이 빈정거리는 말은 아님을 나타내고 있었다. 풀이 죽은 준수의 눈빛을 한 번 더 확인한 은설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담담히 준수의 말을 받아 이었다.
“준수 씨가 의사가 됐으면 나한테 장가를 안 들었겠지. 좋은 선자리가 얼마나 많이 들어왔겠어? 나는 병원도 외제차도 아파트도 사줄 수 없잖아요."
"그른가?"
"응. 준수 씨가 의사가 안 되었으니까 이렇게 괜찮은 신랑감이 나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왔죠. 의사 안 되길 참 잘했어, 준수 씨.”
눈치는 무뎠지만 은설에겐 예쁜 말로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재주가 있었다.
“준수 씨 만나기 전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감사하게 생각하려고요."
"무슨 일?"
"무슨 일 아니고 모든 일. 그 일들 없었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바뀌었을 거고. 그럼 준수 씨를 못 만났을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일이 없어.”
“정말?”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준수는 조금이나마 은설을 의심하려 들었던 10분 전의 자신을 후회했다.
이런 여자를.
내가.
감히.
의심이라니!
“저녁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신랑이 쏜다!”
“오예!!!”
매운 한식을 먹느냐, 치즈를 잔뜩 올린 양식을 먹느냐로 준수와 은설이 다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전화가 한 통 왔다.
운전을 하느라 휴대전화를 확인할 수 없는 준수를 대신해 은설이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서방님인데?”
“누구?”
“준수 씨 동생.”
“이 자식이 왜 걸었지?”
“글쎄. 받아 봐요. 난 없는 척 조용히 하고 있을 게.”
준수가 핸즈프리로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와 이리 늦게 받노?]
[운전중이다.]
[그래? 이따 하까?]
[아이다. 얘기해라.]
[와이프 입원 했다.]
[와?]
[배가 많이 뭉쳐가 아프다 케서.]
[우짜다가?]
[우짜긴. 우리 싸우는 거 옆에서 다 봤다 아이가.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지, 뭐.]
[미안하게 됐네. 오래 입원해야 하나?]
[아이다. 먼저 잘못은 내가 했는데, 뭐. 입원도 오래 안 한다. 한 이박 삼일? 안정되면 집에서 쉬어도 된닥 카드라.]
[그나마 다행이네.]
[에, 내가 전화한 이유는 딴 기 아이고 아무래도 큰아버지 팔순엔 우리가 못 갈 거 같아서 그르타. 별일 없음 형이 좀 내려 온나.]
[엄마랑 아빠만 가면 되지. 우리가 꼭 따라 가야카나?]
[우리 결혼할 때 그 집서 다 왔단다. 안 가모 안 된다 카이.]
[그래? 그럼 가야겠네.]
[아버지는 나만 가자는데, 임신한 마누라 배 아프다 케쌌는데 옆자리 안 지키모 픵생 욕먹는다카드라.]
[그르킨 하지.]
[명절 지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먼 길 오게 해서 미안테이.]
준수가 본능적으로 은설을 쳐다보았다.
은설은 싫다 좋다 하는 내색 없이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형이 집에 가서 스케줄 좀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하께. 나도 주말에 일이 많아가 확인 좀 해봐야 된다.]
[알으따.]
통화가 끝나자마자 은설이 한소리를 했다.
“명절에 동생하고 타이틀매치 한 후유증이 제대로 와 버렸네요. 그러게 왜 임산부 보는 앞에서 치고받고 싸움을 하고 그래요.”
“원래 형제들끼린 다 그러면서 푸는 거예요.”
“준수 씨는 아마 동서한테 평생 미운털일 거야. 어쩜 나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왜?”
“어쨌거나 저쨌거나 임신 기간 동안 서럽게 했으니 그렇지. 변변히 축하도 제대로 못 받고.”
“제수씨한테 그랬나. 영수한테 그랬지."
준수가 말꼬리를 흐리며 뒷수습에 대한 나름의 계획을 말했다.
"애기 나오면 축하 많이 해주고. 선물도 좀 좋은 걸로 사주고. 그러면 되지 않을까?”
“그게 그렇게 풀리는 게 아니라니까.”
“암튼 영수랑은 화해했잖아. 그랬으면 됐지, 뭐.”
명절 당일, 준수는 영수 얼굴을 보지 않을 것이라며 아이처럼 생떼를 부렸다.
영수 역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오지 않으려 하는 것을 어머니가 나서서 설득을 했더랬다.
형제끼리 한 번은 만나서 풀려고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영수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본가를 찾았다.
결국은 어머니가 차려놓은 맥주 소반을 사이에 두고 주먹과 발길질이 두어 차례 오갔고, 형이라는 위치와 훨씬 더 크고 무거운 덩치를 가진 준수의 승리로 몸싸움이 끝났다.
“내가 봤을 땐 서방님이 그냥 맞아준 거야.”
“지가 맞아야지. 내가 형인데. 근데 사실 나도 아팠어. 그 눔 자식 머리가 무슨 바위도 아니고. 우쒸.”
“그래, 실컷 때리니 마음이 풀려요?”
“실컷은 아닌데. 다 빗맞았고 제대로는 딱 한 대 머리통 후린 거, 그거만 맞았거든. 딱! 하고 소리가 나니까 ‘아, 됐다. 이제 그만 풀자.’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
“도련님도 오히려 한 대 맞고 형하고 마음 푼 걸 더 좋아하는 거 같아.”
“형제끼린 다 그래요.”
원래가 사이좋은 형제지간이었다.
준수의 말로는 여태 이렇게까지 사이가 틀어졌던 적이 없었다고 했다.
준수도 영수도 지난 몇 달간 이어진 형제간의 갈등이 힘겨웠던 듯했다.
가족 사이일지라도 각자도생이 더 익숙한 은설에겐 낯선 모습이었다.
“그래요, 뭐. 풀었으면 됐지. 그나저나 큰 아버님 팔순은 언제야?”
“다다음주 정도였던 거 같은데. 다시 확인해 봐야 정확히 알겠어.”
“다다음주면 곤란한데. 우리 인공수정 하는 날짜랑 겹칠까 봐 걱정이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 다시금 정적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