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바빠요. 몇 주 정신 빼놓고 지낸 바람에 일이 많이 밀렸어. ]
시술을 집도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들어온 미주의 메시지를 보고 현준이 실망 섞인 한숨을 쉬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현준의 물음에 미주의 답신이 전처럼 제깍 도착하지도,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게 하지도 않는 속도로 도착을 했다.
[약 먹은 지 이제 이틀째인데, 뭘.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아직까진 괜찮아요.]
[내일 저녁은 시간 괜찮나?]
[신경 쓰지 마요. 진료도 아닌데 굳이 만나서 상태 확인할 필요 없어요.]
[그런 거 아냐. 그럼 주말은?]
더 이상의 답신은 없었다.
미주는 필요 이상의 관심에 대해선 현준에게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제까지는 현준이 그으려 애썼던 그 선을 이제는 미주가 긋고 있었다.
누군가 불에 달군 무쇠 덮개를 씌워 놓은 것처럼 심장 언저리가 뜨겁고 답답했다.
현준은 은설에게 시술했던 좀 전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이것 역시 목구멍부터 위문까지 굵은 관이 한 줄 들어차 있는 것 같은 갑갑함.
합방일을 잡아주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게감이었다.
‘시술이 이루어지고 나면 은설이 정말로 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될지 모른다.’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난임 전문 의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긋난 바람이 현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실패. 실패. 실패······.’
시술은 성공적이었으나, 결과는 참혹하기를.
제어되지 않는 뇌의 움직임이 현준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성을 되찾아야 했다.
현준은 미주의 차트를 다시 한번 살폈다.
자궁내막암 1a기.
3개월 뒤 소파술 예정.
파루틸 3개월 복용 처방.
‘이것 말고 내가 더 해줄 수 있는 것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미주의 진단과 치료는 원장 선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현준은 그저 주치의 아닌 주치의이자 이혼한 전남편일 뿐이었다.
은설에게도 미주에게도 두어 걸음쯤 떨어져 있는 무력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신의 위치에 현준은 싸움 없는 패배감을 느꼈다.
“선생님, 예약환자분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정간호사의 부름이 혼돈 속에 부유하고 있는 현준의 정신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시술 예약이 풀로 찬 날이라 그런가, 환자분이 꽤 많이 밀렸어요.”
“알겠어요.”
정간호사가 진료를 서둘러달라는 요청을 에둘러 표현했다.
현준은 정간호사가 근간에 전해 준 ‘류현준 교수에 대한 평가’를 떠올렸다.
“선생님 친절하고 설명도 꼼꼼히 잘해주셔서 좋다고 난임 카페며 지역 맘카페마다 칭찬이 자자한데, 저는 선생님이 꼼꼼하고 친절하신 게 이제 좀 싫어지려고 그래요."
"왜요?"
"환자가 자꾸 밀리니까 대기를 한두 시간도 넘게 한 환자들이 가끔 저한테 화낸단 말이에요.”
“알겠어요. 대기실에 환자수가 좀 누적되었다 싶으면 얘기해 줘요.”
정간호사의 핀잔 아닌 핀잔을 들으며 현준은 짐짓 웃음이 났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빙봇’ 소리를 듣던 류현준 교수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도 극적인 반전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상반된 두 평가의 중심에 두 사람이 존재하고 있음을 현준은 부정할 수 없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어도 달려갈 수 없었던 두 사람.
미주 그리고 은설.
현준은 자신이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 어느 곳에도 섣부른 걸음을 옮길 수 없어 방황하고 있는 바보가 있을 뿐이었다.
미주가 가진 것이 부담스러워 도망쳤으면서 완전히 미주를 끊어내지도 못하는 머저리.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으면서도, 이미 결혼해 아이를 만들려 애쓰고 있는 은설에게 난임 치료를 빌미로나마 만나주길 구걸했던 겁쟁이.
기다려도 답신이 오지 않는 휴대전화를 멍청히 바라보며 현준은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직시했다.
'거지 같네.'
“선생님, 환자분이요. 이제 들어오실 거예요.”
정간호사가 넋을 놓고 있는 현준을 재촉했다.
정간호사는 진료실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만드는 또 하나의 축이었고, 지금은 그런 정간호사의 말을 들어야 할 때였다.
현준이 책상 위를 나뒹구는 이면지에 의미 없는 메모를 끄적이며 다시금 진료에 정신을 집중하려 애를 썼다.
[말을 줄일 것. 안부 생략. 설명 생략. 질문엔 간단히 ]
미주는 재빨리 휴대전화를 가운 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뭘 그리 놀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왜 숨기고 그래.”
“그래서 뺏어다 확인하시게요?”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다 참기로 했는지 아버지는 입술만 조금 들썩이다 말뿐 말을 더 잇지 않았다.
“병원에서 제 방 문을 그렇게 벌컥벌컥 여는 사람 이사장님 밖에 없어요. 프라이버시는 둘째치고 예의를 좀 지켜주셨으면 해요.”
“아비 자식 사이에 예의는 무슨.”
이사장이 말을 아꼈다.
못마땅하다는 말투이면서도 미주의 심기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한 표정이었다.
“류현준 선생하고 연락 중이었어요. 파루틸 복용한 지 이틀 째니까 혹시 부작용 겪고 있는 것 없는지 간단한 안부요.”
“염치없는 놈이 이제야 제 몫의 노릇을 하려나 보구나.”
“그 사람이 해야 할 몫이 어디 있어요. 염치는 이혼한 마당에 찾아가 어려운 부탁한 우리가 없는 거죠.”
“말은 이제 가려하지 않기로 한 거냐?”
“스트레스가 최악의 독이잖아요.”
한마디를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미주의 모습은 한 이사장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쉬어라. 그 말하려고 왔다.”
“싫어요.”
“니가 지금 남의 심장 들여다보고 있을 때야?”
“집에 들어앉아 가만히 누워 있으면 뭐가 더 나아져요?"
"······."
"돌아가신 엄마 생각하면서 시간이나 죽이고 있겠죠. 환자들은 저를 또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연수 다녀와서 복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휴직이라니. 이사장님도 참.”
은설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죽댔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이건 간에 무조건 토를 달며 반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직을 강권하는 아버지의 속내가 결국은 빠르게 치료를 마치게 한 후 자신을 다시 선시장에 내놓으려는 의도로만 보였다.
더 이상은 꼭두각시놀음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제껏 그리 살아온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그간 억눌러 왔던 울분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뭐라 하든 이혼하지 말고 버텼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배에게 우기고 떼를 써서라도 시험관을 진행했었어야 했다.
어머니는 국내외 최고의 의료진을 주치의로 두고도 결국 버텨내지 못했었다.
아들 하나만 더.
아버지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때도 그랬다.
무엇을 위해 엄연히 존재하는 위험을 감수해 가며 자신이 호르몬치료를 택해야만 하는가를 생각하다 보면 아버지에게 참기 어려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또 하나의 원인제공자라는 생각에 현준 역시 원망스러웠다.
전에 없이 누그러진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두 사람을 볼 때면 이제와 때늦은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짜증이 났고, 함부로 대하여 어떻게든 생채기를 내주고 싶었다. 그러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안녕을 체크하는 아버지에게 뒤늦게나마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좋았고, 몸도 마음도 세심히 살펴주려 애쓰는 현준을 보면서는 혹시 어찌 전개될지 모를 이 투병생활이 계기가 되어 그와 다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괜한 기대와 상상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서둘러 아버지를 문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으면서 미주가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그레이드가 몇 단계 다운 된 다음 선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아버지를 미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를 꼭 낳지는 않아도 되는 자리.
이혼한 아내와의 사이에 이미 두 자녀가 있다고 했다.
“치료에 운이 따르지 않으면 자궁을 적출할 수도 있으니 그 상황에 맞는 자리를 알아봐 두었단 이야기를 하시려던 건 아니겠지. 배울 만큼 배운 분이 말이야.”
만약 그리 되어도 남들 보기에 썩 나쁘지는 않은 자리가 얼마든지 있으니 재혼 걱정은 하지 말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었다.
미주의 마음 한편이 아버지를 두둔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