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야동이 너무 별로였단 거야. 도대체 그런 걸 보고 뭘 하라는 건지.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진짜 정말 하는 내내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었다고.”
아무거라도 야한 것만 척하고 보면, 남자는 다 탁하고 반응이 오는 줄로만 알았던 은설은 준수의 투덜거림에 짐짓 놀랐다.
“별로 안 야했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만든 야동 같았어.”
“그랬구나.”
무어라 대꾸를 해주어야 할지 몰라 은설이 난감해하고 있는데 준수가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잘 나올 턱이 있나.”
“응?”
“은설 씨도 알잖아. 내가 분위기라든가 환경적인 요인에 꽤 예민한 거."
"아······."
"낯선 장소에서 불쑥북쑥 들려오는 바깥소리에 신경 긁혀가며, 재미도 없는 야동 억지로 보면서 이게 평소처럼 많이 펑펑 나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거 아니겠냐고.”
은설은 그제야 준수가 끝도 없이 툴툴거리는 이유를 알았다.
“많이 안 나왔어?”
“그래도 간호사가 최소 여기까지는 받아와야 한다고 금 그어준 거엔 간당간당 닿았어.”
말하는 준수의 목소리가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럼 됐지, 뭐. 신경 쓰지 마요. 고생 많았네, 우리 신랑. 그런 데 들어가서 억지로 했으니 얼마나 속상했을꼬. 마누라가 음료 비싼 걸로 사줄게요. 먹고 기분 풀어요.”
은설이 준수를 도닥이며 ‘우쭈쭈’ 해주었다.
“혹시 다음에 또 하게 되면 그땐 내 태블릿을 가지고 들어가야겠어.”
앞으론 태블릿을 챙겨 가겠다고 말하는 준수의 눈빛에서 단단한 결의가 느껴졌다.
“드디어. 하는구나.”
“긴장 돼?”
“조금. 아프면 어떡하지?”
“지금까지 잘 견뎠으니 오늘도 견딜만할 거야. 파이팅.”
시술실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엔 준수가 은설을 격려했다.
간호사의 호명을 듣고 시술실 안으로 입장하면서 은설이 뒤를 돌아 한번 더 준수를 바라보았다.
준수의 눈에 혼자서 롤러코스터를 타러 가는 아이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은설이 들어왔다.
기대와 두려움이 엇갈리는 눈빛.
그것만으로도 준수는 은설이 짠하여 마음이 아렸다.
시술실 입구를 들어서니 또 다른 병원에 들어온 듯했다.
슬리퍼를 신고 입장한 곳엔 아담한 대기실이 있었고, ‘ㅁ’ 자 형태로 배치된 소파에는 시술복인 듯 보이는 분홍 가운을 입은 여자 네다섯이 앉아 있었다.
간호사가 대기실 안쪽의 탈의실로 은설을 안내했다.
“상의는 탈의 안 하셔도 되고 하의는 모두 탈의하시고 가운 입으세요.”
일이 바쁜지 간호사가 간략한 안내만 남기곤 종종걸음으로 대기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같은 병원 간호사라고 다 같이 친절한 건 아닌가 보네.’
은설은 정간호사가 그리워졌다.
시키는 대로 탈의한 뒤 가운을 입고 은설이 쭈뼛거리며 대기실로 나왔다.
소파엔 여자들이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둘러앉아 각자의 휴대전화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은설이 사이를 비집고 앉으려 하자 여자들이 일제히 엉덩이를 조금씩 움직여 또 엇비슷한 간격의 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한쪽 벽면에 걸린 아무도 보지 않는 TV에선 마음에 평안을 주려는 의도로 틀어 놓은 듯한 영상과 음악이 지루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설도 챙겨 온 휴대전화를 들었다.
[옷 갈아입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 중]
[오래 기다려야 함?]
[몰라요. 지금 나보다 여기 먼저 온 사람 5명 정도 더 앉아 있어요.]
[헐. 대기가 많네.]
[기분이 좀 묘함. 똑같은 시술받으려고 여자 대여섯이 쭈르륵 앉아 있으니.]
[말이라도 좀 나눠봐요. 다들 같은 고민 가지고 있는 사이인데]
[다들 그냥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는데. 아무도 말 안 함.]
[그럼 은설 씨도 나랑 까똑을 하든가 게임을 하든가 그러셈.]
[오래 기다릴 수도 있으니 게임을 하겠음!]
게임에 집중할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는 않아서 은설은 게임 대신 인터넷 뉴스를 이것저것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곧 호명이 시작되고 여자들이 하나씩 탈의실 너머 더 깊숙한 곳의 시술실로 들어갔다.
“이은설 환자분 들어오세요.”
간호사를 따라 들어간 시술실 한쪽엔 여러 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커튼막을 둘러쳐 가려놓은 곳엔 은설보다 앞서 들어갔던 여자들이 누워있는 듯했다.
간호사는 침대 맞은편의 자동 유리문 안쪽으로 은설을 안내했다.
수술실과 흡사하게 생긴 시술실에는 현준의 안쪽 진료실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생긴 굴욕의자가 놓여있었고, 그 주위로 이런저런 복잡한 기계장치들이 보였다.
“진료 보실 때처럼 자세 잡으시면 돼요.”
시술실의 간호사는 상냥하진 않았지만 부드럽고 차분했다.
은설이 자리를 잡고 앉으니 간호사가 재빨리 자세를 가다듬어 주고 자리를 정리했다.
왠지 그냥 믿음이 갈 만큼 능숙한 간호사의 몸놀림에 은설은 조금 안심을 했다.
간호사가 인공수정 시술을 위한 세팅을 마치니 현준이 시술실로 들어왔다.
“이은설환자 본인 맞으시죠?”
현준이 통과의례를 치르듯 감정이 빠진 목소리로 은설의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네.”
옆에 서 있는 간호사가 정간호사가 아니니 괜스레 대답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확인하겠습니다.”
간호사가 아이 팔뚝만 한 기계를 들고 와 은설의 팔찌와 시술대 옆 트레이 위에 놓여 있는 기다란 플라스틱 대롱의 바코드를 차례로 찍었다.
[배우자가 맞습니다]
기계에서 낯간지러운 확인음이 나오고 곧바로 현준의 시술이 시작되었다.
빠르고 부드럽게 질경이 삽입되었고 현준이 짧게 ‘에고’하는 소리를 냈다.
“왜요, 선생님?”
“잠시만요, 자 시술 끝났습니다.”
“네?”
스르륵 하고 기다란 대롱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슬쩍 나는 것으로 은설은 시술이 이미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시술이 엄청 빨리 끝나네요, 선생님. 근데 좀 전엔 왜 ‘에고’ 하셨나요?”
현준이 인공수정 시술을 마치는데 까지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은설의 얼굴을 보며 현준은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 띤 얼굴로 간략한 설명을 시작했다.
“남편의 정자는 이번에도 저번 검사 결과와 상태가 비슷했어요. 정자수나 운동성은 괜찮았지만 정액 자체의 양이 좀 적었어요."
은설도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도 최소 기준치엔 도달한 수준이었고, 튼튼하고 건강한 녀석들만 골라서 넣었으니까 이 부분은 안심하고 있어도 괜찮아요."
"네."
"이은설 환자는 나팔관까지 가는 길이 조금 굽어 있었어요. 걱정할 만큼 구불구불한 건 아니고. 조영술이나 인공수정 시술할 때 좀 아프고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어쩐지.'
은설이 조영술 때의 고통을 떠올렸다.
"그래서 작게 ‘에고’ 소리가 나왔는데, 들렸어요?”
“네. 원래 의사 선생님 입에서 그런 소리 나오면 크게 들려요. 환자 귀엔."
"앞으로 조심할게요."
현준에게 타박을 해놓고 조금 미안해진 은설이 멋쩍게 말을 이었다.
"근데 좀 전엔 걱정하셨던 거만큼 아프진 않았어요.”
“다행이네요. 고생했어요. 초음파로 정자들이 잘 들어갔나 확인해 볼 거예요. 자 여기 모니터 보시고.”
현준이 곧바로 질초음파를 들어 자궁 내막 깊숙이 담겨 있는 정액의 모습을 확인시켜 줬다.
“여기 반짝거리는 부분이 방금 전에 들어간 녀석들이에요. 시술은 아주 잘 되었으니, 이제 이 녀석들 중 하나가 무사히 아기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일만 남았어요.”
“네.”
은설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수줍게 대답했다.
간호사가 은설을 여러 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인 쪽으로 데려왔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침대 사이로 자리를 배정받고 쭈뼛거리며 침대 위로 몸을 뉘이는데, 첫 번째 침대의 여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 옆이 비니 그래도 좀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간호사가 곧 종이 한 장과 잠시 보관해 주었던 은설의 휴대전화를 가지고 왔다.
“여기서 15분 정도 누워 휴식을 취하셨다가 이동하시면 돼요.”
하면서 내민 종이에는 임신반응검사 일시와 프로게스테론 질정제의 사용법, 그리고 임신이 되지 않았을 때의 재방문일자가 적혀있었다.
가지런히 누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처음 그대로 유지하며 최대한 정갈한 몸가짐을 유지했다.
사방에 전자파를 뿜어내는 것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왠지 거북스러워서 휴대전화는 손을 뻗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아랫배로부터 먼 곳으로 밀어두었다.
시간이 더디고 지루하게 한 발 씩 한 발 씩 발을 세어가며 흘렀지만, 간호사에게 받아 둔 종이마저도 두 번 읽는 일 없이 가만히 배 위에 얹어 둘 뿐이었다.
아무튼 지간에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은설이
무던히도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