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한결 편안한, 그래서 섭섭한.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토요일 퇴근 무렵, 미주가 현준에게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봉사활동에서 돌아온 혜진과 함께 제주의 늦가을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서울에 없으니, 이번 주말은 굳이 자신에게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은연 중의 메시지였다.


[아버님 어머님은 봉사활동 기간을 연장하셨다면서요? 어쩌면 몇 년 장기체류하실지도 모른다고 혜진이가 그러던데?]

[그래?]

[자기 부모님 소식에 어째 남보다 더 둔할 수가 있어요? 전화 안 드려요?]

[바쁘셔. 여유 있으실 때 내게 하시지.]

[다음번에 영상통화라도 하게 되면 자세히 여쭤보세요. 아직도 내가 이런 것까지 챙겨줘야 해요?]

[그러게. 내가 또 신경 쓰이게 했네.]

[바쁜 건 선배나 나나 같으니, 무심한 것에 바쁘단 핑계는 붙이지 말고 부모님께 신경 좀 쓰면서 지내요.]

[암튼 알려줘서 고마워.]


채팅을 마친 후 현준은 미주가 보낸 사진을 다시 한번 살폈다.

섭지코지에서 찍은 셀카인 듯했다.

까맣게 그을린 혜진 옆에 하얀 장밋빛의 미주가 청명한 늦가을의 하늘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분노도, 비아냥도, 빈정거림도, 두려움도, 우울도 아무것도 섞여 있지 않는 순수한 웃음 그대로의 웃음이었다.

“고맙네, 혜진이. 언제 밥 한 번 사야겠어.”

현준은 후배이자 미주의 친구이기도 한 혜진이가 자신이 해주지 못하는 무언가를 미주에게 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늘려 썩 잘 나온 미주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살폈다.

이렇게 건강히 웃고 있는 사람 안에 암세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의사인 현준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까또.

“응?”


[기분은 어때? 쉬니까 마음이 좀 편안해졌어?]


현준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현준의 메시지가 반가워 은설은 자신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래도 힐링하려고 애쓰고 있어.]

[어떻게?]

[맛있는 거 사 먹고. 산책도 하고.]

[남편이 애써주시는구나.]

[혼자서. 남편이 요새 거의 일주일에 8일 일하는 사람처럼 바빠.]

[간만의 휴식인데 함께 해주셨어야지.]


메시지를 쓰면서 현준은 스스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썼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다음 메시지를 적을 때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손가락을 놀렸다.


[같이 밥 먹을래? 맛있는 집 알면 좀 데려가 줘.]

[그래 그러자.^^]


은설의 메시지에서 고민 없이 답신을 보낸 티가 났다.

지난번 형석과 셋이 시간을 보낸 이후로, 어쩌면 남편과 셋이서 대면을 한 이후로 현준은 자신을 대하는 은설의 태도가 한결 편안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담임반 남자애를 다루는 선생님처럼.

편안해진 은설의 모습을 자신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현준 스스로도 헷갈렸다.

다만 그것이 남자사람친구도, 그렇다고 애인도 아닌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느끼게 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문득문득 섭섭함이 치밀어 오르곤 했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따지고 들거나 내색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괜한 투정이 오히려 은설을 전보다 몇 발 더 물러서게 할까 두려워, 한 때 가장 친한 사이었던 그 옛날의 절친 코스프레를 하며 은설의 안위를 걱정할 뿐.


[그럼 오늘 저녁 같이 먹자.]


은설이 링크 하나를 보내며 연달에 메시지를 이었다.


[위로 겸 밥 사주고 싶어서 같이 먹자는 거지? 얻어먹는 내가 니 쪽으로 갈게. 이리로 와. 적당하면서 썩 괜찮은 식당으로 골랐으니, 안심하고. ㅎㅎ]




레스토랑 입구 근처에서 현준을 기다리고 있는 은설은 멀리서 보기에도 시술을 진행하던 지난달보다 표정이 한결 밝았다.

매번 출근 전에 들렀던 아침 진료 때와는 사뭇 다르게 옷차림도 화사했다.

“오늘 예쁘게 입었네.”

놀랍다는 듯 현준이 입을 길고 동그랗게 모으며 은설에게 다가왔다.

“옛날 남자친구 만나러 나오는 길이라 멋 좀 부려 봤어."

은설이 어깨 언저리를 덮고 있는 머리칼을 휙 하고 튕기며 도도한 체를 했다.

“옛날이란 말은 빼면 안 돼? 그때 딱히 뭐 헤어진 것도 아니게 헤어졌었잖아.”

농담인 듯 진담인 듯 현준이 은설을 채근했다.

“내가 유부녀라 그건 좀 곤란하겠어. 남편하고 사이가 안 좋아지면 그땐 생각해 볼게.”

은설 역시 혹시나 진심은 아닐까 싶은 농담으로 현준에게 화답했다.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 들어선 곳은 퓨전레스토랑이었고, 서버로부터 창가 쪽 자리를 안내받은 은설은 한참이나 레스토랑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멋스럽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인가 봐.”

“멋스럽다는 단어 오랜만에 들어 보네.”

“단어선택이 좀 구식이지? 요즘 수업하는 내용이 근대문학이라 그런가 봐.”

은설이 멋쩍게 웃으며 데코레이션이 제일 세련되어 보이는 새우요리와 아기 머리만 한 미트볼이 얹어져 있는 파스타를 주문했다.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이 여기 얘기를 종종 해서 한번 와보고 싶었어. 강 아래쪽으로 내려올 일이 없어서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니가 밥 먹자고 해서 ‘옳다구나’ 했지. 하하.”

은설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현준은 그것이 자신과 함께이기 때문이길 바랐다.

“인공수정 하는 동안은 니가 의사 선생님으로만 보였는데. 지금은 다시 친구로 보이네. 신기하지? 근데 너도 진료실에선 나한테 좀 데면데면했어. 알아?"

"내가 언제? 정간호사가 요즘 맨날 칭찬해. 병원에서 제일 친절한 의사라고."

"첨 인공수정 상담받으러 간 날. 엄청 딱딱한 의사 선생님이었어, 너. 남편한텐 너 되게 친절하다고 자랑도 해놨었는데 말이야. 남편하고 같이 있어서 그런가 싶긴 했지만.”

은설이 조금은 섭섭했다는 내색을 했다.




현준은 미주를 떠올렸다.

그 무렵 현준은 미주의 내막암 진단과 치료를 같이 진행하고 있었다.

“그때 일이 좀 많았어. 정신없었을 때라 내가 좀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근데 남편은 니가 마음에 드는 눈치더라.”

“설마.”

“하하. 왜 설마야? 의사 친구 말 잘 들으라는 식으로 자주 이야기 한다니까.”

“그랬군.”

남편의 이야기엔 할 말이 별로 없다는 듯 현준이 짧게 답했다.

“나중에 다 같이 한 번은 만나는 일이 있지 않을까? 너랑 형석이랑 수지랑 수지 남편이랑 나랑 우리 남편이랑. 참, 수지도 시험관 하고 있어, 태국에서.”

“그래?”

미트볼을 부수어 은설의 앞접시로 옮기던 현준의 눈길 끝에 반지하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익숙한 그림자가 걸렸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키가 큰,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느 때와 달리 청바지에 새하얀 맨투맨 티셔츠를 받쳐 입은 캐주얼한 차림의, 멋스러운.

미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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