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잠깐 쉬는 것도 좋은 방법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결과는 뭐 그렇게 됐어, 이번에도. 뭐? 너도?]


수화기 너머로 수지가 뒤늦은 고백을 해왔다.

자신도 그곳에서 시술을 했노라고.

태국에서 시험관 시술을 진행했던 수지 역시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한국 잠깐 들어가서 하나 여기서 하나 비용을 계산하니 결국 그 돈이 그 돈이더라고. 좋은 결과 나와서 안정기까지 들어서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꽝나서 속상한 김에 너한테 고백하는 거야.]


힘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은 수지의 목소리는 몇 년 만인 듯했다.

늘 언제나 항상 은설보다는 사정이 나았던 수지는 좀처럼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었다.

힘든 일이 없어서 힘들어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씩씩하기만 한 수지에게 은설은 위로다운 위로를 해줘 본 적이 없었다.

은설은 지금이 빚을 갚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수지에게 심적으로 많은 의지를 하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변변한 의지처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던 마음의 빚.

한편으론 위로를 받고자 전화를 건 수지에게 되려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만 같아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은설은 자신의 마음도 수지의 마음도 모두 보듬을 수 있는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나 2차 인공수정도 실패해서 마음이 아주 너덜너덜 해졌는데, 넌 나보다 더 하겠지? 뭐라고 위로를 해주고 싶은데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어떤 말도 위로가 잘 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수지가 웃음이 살짝 섞인 말투로 되려 은설을 다독였다.


[잘 알면서 뭘 위로를 해주려고 그러냐. 이렇게 너한테 얘기하는 걸로 됐어. 알지? 나 속상한 얘기 잘 못하는 스타일인 거.]

[알어.]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너 아니면 이런 얘기 어디다 잘하지도 못한다, 나.]


은설은 최근 몇 년 간의 수지가 항상 밝은 에너지를 발산해야만 한다는 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지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것이 정말로 밝았던 것이 아니라 밝으려 애썼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제야 수지가 짠해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수지의 모습이 어쩌면 몇 년 뒤의 자신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더욱더 수지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들었다.


[골드미스 버금가도록 멋지게 사는 딩크족 흉내를 내보려 했건만. 결국은 태국 난임센터 굴욕의자에 앉아 있더라, 내가. 이놈의 미련은 끊어지지가 않아.]

[많이 힘들었지? 남편 바빠서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을 텐데 외롭고 서러워 어찌 버텼을꼬. 우리 수지······.]

[알잖아. 왠지 임신이 된 거 같아서 시술 후에 결과 기다리는 2주는 은근히 버틸만한 거. 이제부터 한동안은 후유증에 좀 시달리겠지.]


맞는 말이었다.

성공에 대한 기대감 덕에, 12시간 간격을 칼같이 맞춰가며 프로게스테론 질정을 넣는 일도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저녁 약속을 잡기가 어려워서, 사람이 고프면 그저 준수가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어도 이것도 다 추억이 될 고생이란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가 결코 진해질 리 없어 보이는 임신테스트기를 서너 개쯤 버리고, 결국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자 통보를 받고 나면 그제야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허무감이었다.

몸속에선 이미 2주 전에 늦어도 1주 전에는 결과가 정해졌을 터였다.

대롱을 타고 자궁 깊숙한 곳에서부터 출발한 한 무리의 건강한 정자들은 결국 24시간 안에 5개의 난자 어느 것 중 하나와도 만나서 결합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혹은 결합했더라도 끝끝내 내막 위에 안착하지 못한 채로 그냥 흘러내렸을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헛된 희망을 품고 보낸 꼬박 2주의 시간.

은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질정을 온 정성을 다해 넣으며 임신이 된 후의 상황을 상상하고, 앞선 기쁨과 행복한 걱정을 누렸던 시간들을 허망이 떠올렸다.

그 모습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져서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옛날에 티브이에서 코미디언들이 했던 그 바보 밥풀 떼어먹기 개그 생각 나?]


수지가 뜬금없이 옛이야기를 꺼내었다.


[오른쪽 팔 목 뒤로 돌려서 왼쪽 뺨에 붙은 밥풀 떼먹는 거?]

[응. 자꾸 그게 생각 나.]

[왜?]

[헛수고. 내가 하는 짓이 그거인 거 같아서.]


수지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빠진 은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생각이 정리된 듯 대화를 이었다.


[아니야. 우리가 하고 있는 건 그거 하고는 좀 다르지.]

[바보 짓은 아니란 거지?]

[아니. 그 개그맨이 연기한 바보는 밥풀을 떼어먹었잖아. 우린 밥풀이 없는데도 손을 돌려서 밥풀을 찾아 볼때기만 더듬고 있는 모양새인 거야.]

[아···그래. 맞아. 그랬지 우리···.]

은설의 자조에 수지가 서글픈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은설아, 우리 이제 자학은 그만하자.]

[그래, 그러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상대와의 대화인데도 마음이 한결같이 '다운' 일로를 걸었다.




“이번 달은 좀 쉬어가려고.”

안쪽 진료실에서 초음파 진료를 마치고 나오며 은설이 먼저 쉬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잘 생각했어.”

“왜? 초음파에 뭐 안 좋은 거라도 보였어?”

쉬어가는 것에 대해 현준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은설이 덜컥 겁을 먹고 현준에게 캐물었다.

“아니. 당장 3차 진행해도 좋을 만큼 괜찮아, 몸은.”

“근데 왜······.”

“니 마음이 불안해 보여서."

"그래 보여?"

"다른 질병이 다 그러하듯이 난임도 스트레스가 중요한 영향을 미쳐. 스트레스 관리가 우선으로 보이는 환자에겐 시술을 굳이 권하지 않아."

"그렇구나."

"너 아직 노산도 아니잖아. 한두 달 쉬어간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맞는 말이었고,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어선지 더더욱 맞는 이야기로 들렸다.

“다음 달에 인공수정을 또 할지, 시험관을 할지 고민 중이야.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우기면 시험관을 해주긴 할 거니?”

“시험관 시술로 진행하는 것에 대한 네 의지가 확고하다면. 의사로서의 소견을 묻는 다면 인공수정을 한 번 더 진행하는 방향을 추천하고.”

“왜?”

“현재로선 네 쪽엔 문제가 없으니까. 너희 부부가 겪고 있는 난임 상황에서 굳이 문제가 될만한 점을 찾자면 남편 쪽의 정액량 부족 정도뿐이야. 이럴 경우 보통 인공수정을 추천해."

“그렇구나.”

“한 달간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서 알려줘. 원하는 대로 진행해 줄게.”

“응.”

“아니, 생각하지 마.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놀아.”

정정된 현준의 당부에 은설이 피식 웃었다.

“펜은 쓸 만해?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짬이 없었네.”

은설이 현준의 손에 쥐어져 있는 펜을 보며 물었다.

일전에 은설이 선물한 새 펜이었다.

“응. 잘 쓰고 있어. 전에 거보다 더 좋아.”

“중학생 여자애가 고른 것보다. 서른 넘은 여자가 고른 게 당연히 더 좋아야지 않겠어?”

은설의 말에 현준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남편은 잘해줘? 맘에 안 들면 다음 진료 때 데리고 와. 혼내줄 테니.”

“같이 있을 땐 잘해줘. 다시 바쁜 시즌이 돌아와서 매일 야근이라 그렇지. 이번 달에 쉬어가려는 게 남편 사정도 영향이 좀 있어. 정말 바빠, 그 사람이.”

현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낯빛이 어두워져 가는 은설을 보며, 대로에 홀로 버려진 어린아이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측은했다.

은설은 은설대로 몹시 마음이 쓰였고, 그것이 현준을 괴롭게 했다.

미주의 일로 잠시 주춤했던 은설에 대한 마음이 다시금 움틀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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