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출근준비를 모두 마친 은설이 아직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준수의 옆에 차분히 다시 누웠다.
누운 채였지만, 꽤나 익숙한 솜씨로 손을 놀려 은설은 협탁 서랍 맨 윗 칸에서 프로게스테론 질좌제를 꺼내었다.
이번 차엔 약국에서 약을 쉽게 넣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어플리케이터도 함께 주었었다.
은설이 어플리케이터도 꺼내었다가 잠시 고민한 뒤 도로 서랍 속에 넣었다.
‘탐폰도 잘 못 쓰는데. 이것도 비슷하겠지?’
이미 손가락을 사용하여 약을 넣는 것에 익숙해진 터였다.
새로운 도구에 다시 적응하려 애쓰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가 않았다.
은설이 어플리케이터를 서랍에서 뺐다 넣었다 하는 사이 은설의 사부작거리는 움직임 때문에 준수가 잠에서 깼다.
준수가 상체를 반만 들어서 자신의 옆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은설의 얼굴을 한 번 확인했다.
“출근 준비도 다 했나 보네.”
“응. 그래야 마음이 편해서.”
준수가 침대 구석에 놓아두었던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30분도 넘게 여유 있는데?”
“일어나서 몇 걸음 걸으면 약이 줄줄 흘러내리는 게 느껴진단 말이야. 되도록 오래 누워 있어야 약발도 잘 받는 거 아닌가 싶어서.”
“설명서에는 5~10분이라고 쓰여 있잖아.”
“알아. 그래도 30분쯤 누워 있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은설이 살짝 짜증을 냈다.
머쓱해진 준수가 도로 누워 은설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거 삐쳐서 등 돌린 거 아냐. 은설 씨가 쳐다보면 부끄럽다고 자기 약 넣을 땐 등 돌리고 있으라 해서 이러는 거야.”
“알아요. 누가 뭐래?”
은설이 준수에겐 말을 퉁명스레 던졌으면서, 손에 쥐고 있던 질정제의 포장은 아주 조심스럽게 뜯었다.
“조심해요. 나 약 뜯었어. 준수 씨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약 떨어뜨릴지 몰라.”
“어차피 안 돌아누울 거야, 쳇.”
삐친 체를 하는 준수의 목소리에 다행히 진심은 없는 듯했다.
은설이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레 약을 쥔 상태에서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인공수정 시술 후 2주간 매일 아침저녁으로 해야 하는 일이고, 벌써 2차 인공수정 시술 과정도 종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질좌제를 넣는 일은 아직도 어색했다.
[손가락 길이만큼 들어간 깊숙한 위치에 넣어둘 것.]
질좌제를 넣을 때마다 뇌까리는 투약 방법이었다.
입구 근처에 어설프게 넣어두었다간 녹다 만 찌꺼기가 쑤욱하고 떨어져 나올 것이다.
인공수정을 하기 전까지는 넣고 뺄 때의 느낌이 싫어서 탐폰도 잘 안 하는 은설이었다.
약이 녹아 흡수되기를 기다리며 누워있는 30분 동안, 은설은 인공수정 1차 시기에 처음으로 질정을 넣던 때를 다시 떠올렸다.
시술 당일 저녁, 혼자 있는 은설이 걱정되었는지 준수가 칼 같은 정시퇴근이 아니고선 도착할 수 없는 시간에 초인종을 눌렀었다.
“짜잔~”
“뭐야, 벌써 퇴근하고 온 거야?”
생각지도 못한 준수의 이른 퇴근에 반색을 하면서도 은설은 괜히 퉁퉁거리며 투정을 했었다.
“벨 눌러서 놀랬잖아요. 누가 올 시간이 아닌데. 번호키 누르지 왜 초인종을 눌렀어?”
“은설 씨 놀라게 해 줄라고.”
“이럼 오늘 시술받고 온 마누라가 애써 움직여야 하잖아요.”
“친구가 평상시처럼 생활해도 된댔잖아”
“그건 의사가 과학적 근거에 기초해서 알려주는 정보인 거고, 시술받은 당사자인 나의 감정은 종일 누워 있고만 싶은 거고.”
“알았어. 그럼 얼른 가서 침대에 누워요. 내가 만두에 간장 콕콕 찍어가지고 입에다가 쏙쏙 넣어줄게.”
준수가 뒷짐 진 손에 슬쩍 감춰 두었던 만두꾸러미를 은설의 코 앞에 쑥 하고 내밀었다.
“와우, 사거리 만둣집 거네요. 김치반, 고기반?”
“응.”
“찐빵도?”
“당연하지.”
“누워서 먹다가 체하면 더 고생이니, 이건 식탁에 앉아서 먹을 게요.”
좋아하는 만두를 보니 종일 쌓였던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것만 같았다.
만두 서너 개를 연달아 맛있게 입에 넣으며 은설은 준수에게 질좌제 투약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었다.
“12시간 간격으로 넣어야 하는 게 영 부담스러워. 넣고 나면 10분 정도는 누워 있어야 한대. 출근 전에 넣어야 할 테니 아침엔 늦어도 7시에는 넣어야 할 거고, 저녁엔 무조건 정시퇴근 해야 집에서 넣을 수 있어.”
“족쇄구만. 2주 동안 저녁 약속 같은 건 물 건너갔네.”
“누구 만나러 나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서 그건 괜찮아요.”
“내가 많이 놀아줄 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도와줄 일이 있어.”
“뭐?”
“질좌제 넣는 것 좀 도와줘요.”
“응?”
“자연바람에 물기가 날아가게끔 좀 기다리고 있어 봐요. 괜히 움직였다 지저분한 곳에 손 닿게 하지 말고.”
은설은 준수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깨끗하게 씻은 손을 수술방 앞의 의사처럼 쳐들고 준수가 은설에게 일장 설교를 늘어놓았다.
“깨인 여자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탐구하면서 자기 성감대가 구체적으로 어딘지를 확인하기도 하고 그런다고. 반성하도록 해요. 자기 몸을 자기가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에요.”
은설이 프로게스테론 질좌제 캡슐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준수의 손에 쥐어 주며 물었다.
“그런 깨인 여자들에 대한 정보는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예요?”
“묻지 마요. 나는 그냥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야.”
은설의 기대와 달리 질좌제를 넣는 준수의 솜씨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준수의 손가락 끝에 올려진 강낭콩알만 한 크기의 알약은 제 갈 길을 쉽사리 찾아 들어가지 못했다.
“아얏!”
겨우 들여보내고 나선 힘조절에 실패한 준수가 은설의 심부를 푹 하고 찔렀다.
“미안. 실수.”
“실수 두 번만 더 했다간 마누라 잡겠는데.”
“에이, 솔직히 그 정도로 푹 찌르진 않았다. 괜찮아 안 죽어.”
“자기 살도 아니면서 괜찮대. 나의 고통을 함부로 추측하지 말아요. 나 지금 몸도 마음도 되게 예민해.”
다음 날 아침, 은설은 결국 준수를 깨우지 않았다.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누워 있을 시간까지 계산해서 만든 여유시간은 40분이었고, 은설은 10분 안에 이 난감한 상황을 마스터하고 싶었다.
이쯤? 여기쯤? 더 깊이?
한참이나 길을 헤맨 끝에 여기다 싶은 곳을 찾아 프로게스테론제를 안착시킨 은설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 작업을 앞으로 최소 스물여섯 번은 더 해야 하다니······’
그것도 로또 1등에 당첨될 만큼의 행운이 따를 때의 이야기였다.
시술을 2차, 3차까지 진행하게 되면 쉰여섯 번, 여든네 번···.
은설은 이것이 매월 혹은 격월마다 2주간 반복되는 일상이 될까 봐 두려워했었다.
"그랬었는데.... 다시 또 스물여덟 번이나 더 이 짓을 해야 하다니."
프로게스테론 질정제를 내려다보며 혼자서 중얼거리는 은설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미주는 가장 작은 사이즈의 생리대와 팬티라이너를 종류별로 카트에 담았다.
파루틸 복용 후 생긴 소량의 출혈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진료일도 아닌데 현준을 한번 더 만날 수 있었으니, 귀찮은 것만 빼면 밉지는 않은 부작용이었다.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냉동식품코너를 몇 번이나 돌다가 미주가 야채들이 잔뜩 쌓여 있는 청과물코너로 발길을 돌렸다.
“식욕이 고3 때 못지않네.”
이것 역시 파루틸의 부작용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으로 폭발하는 식욕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두려움 때문이었다.
폭풍 같은 분노가 지나간 후, 미주의 마음엔 두려움이 자리를 꿰차고 앉아버렸다.
직업이 의사인 것과 질병에 대한 공포감에 시달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듯했다.
잘 알아서 더 두려운 것도 있었다.
아주 드문 확률로 발생하는 케이스들도 병원 안에선 엄연히 존재하는 일이었다.
특히나 큰 병원일수록.
어머니의 이른 죽음도 미주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의 큰 축을 이루고 있었다.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엄마의 모습은 힘없는 미소와 병색이 짙은 회색빛 얼굴뿐이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미주의 뇌가 자꾸만 그 모습에 자신을 매치시키며 불안을 자가증폭 시켰다.
[마음이 제일 힘들어요.]
이삼일이면 한 번씩 걸려오는 현준의 전화를 미주는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투병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고 있는 지금, 이만큼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상대는 현준뿐이었다.
[운동 열심히 하면 좀 나을까 했는데, 카운트를 못하고 자꾸만 딴생각에 빠져.]
[내가 지금 그리로 갈까?]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선배는 내일도 출근 아닌가?]
[그건 상관없고. 미주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래. 다른 사람하고 어울리면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덜 하게 될 테니. 다시 본가로 들어가는 건 어때?]
[싫어요. 종일 병 생각만 하게 되더라도 여기 있는 편이 스트레스가 덜 해.]
[아버님 너무 미워하지 마. 그것도 결국 관리하기 힘든 스트레스일 뿐이야.]
[안 보면 괜찮아요. 그래서 안 들어가.]
미주가 완강한 목소리로 버텼다.
더 이야기해 봐야 마음만 상하게 할 뿐이라는 생각에 현준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청평 쪽에 실내정원을 제법 근사하게 꾸며 놓은 갤러리가 있어. 일요일에 갈까? 꽃 좋아하잖아.]
[선배도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녜요?]
[무슨 말이야?]
[사람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류현준 씨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너무 많이 다정하고 수다스러워졌어.]
[병원 옮기고 나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환자들이 좋아해서 컨셉을 못 바꿔 이제.]
[빙봇은 완전히 졸업이네요. 안 어울리는 별명이 됐어.]
[예전에도 썩 잘 어울리진 않았어.]
[이젠 따봇이라고 불러줘야겠어요.]
[무슨 뜻인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그냥 아예 별명을 짓지 말아 줬으면 해.]
[싫어요. 따봇씨.]
현준과 미주 사이에 이전까진 없었던 가벼운 농담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