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몽고반점을 볼 때마다, 나는 둘째 딸 영화를 낳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2018년이 떠오른다. 추운 겨울, 자정이 넘은 때쯤이었다. 병원 분만실에 누워있던 내 가슴에 간호사가 태어나자마자 둘째인 영화를 올려 주었다. 그 묵직했던 무게가 가슴을 눌렀다. 영화는 힘겹게 눈을 뜨고 나를 올려보았다. 서로를 확인하고 다시 우리는 몸을 붙이고 쉬었다. 점점 산통이 잦아들고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났다. 첫째를 낳을 때는 없었던 여유였다.
병실로 내려오니 간호사가 바퀴 달린 침대에 깨끗하게 씻긴 아이를 데리고 왔다. 간호사가 멍처럼 내려앉은 영화의 팔꿈치에 있던 몽고반점을 보여주었다. 동전 크기의 몽고반점이 제법 크고 눈에 띄었다. 아이가 바뀔 일은 없겠지만 나는 아이를 이 몽고반점으로 기억해도 될 것 같았다. 간호사는 빠르게 아이가 태어난 시각과 혈액형을 알려주고. 영화의 손가락, 발가락을 하나씩 짚어가며 꼼꼼히 보여주었다. 아이는 건강하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방금 내 뱃속에서 나온 영화를 보는 것이 벅차고 놀라워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계속 간호사의 설명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는 진통이 시작된 후 두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태어났다. 나는 그것이 늘 고맙고 대견해서 네 살이 된 영화에게 아직도 한 번씩 말해준다.
“영화야, 너는 엄마 뱃속에서 이렇게 미끄러졌어!”
나는 손으로 물결이 치는 흉내를 내며 영화에게 늘 그렇게 말한다. 영화는 내 말을 떠올리며, 문득 ‘엄마 내가 이렇게 미끄러졌지요.’라며 그 순간을 상상한다. 그 말을 한 뒤에 영화와 나는 꼭 거울처럼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는다. 우리는 고난을 이겨낸 동지였다. 함께 어딘가를 미끄러지듯 통과했다. 슝 하고.
어느 날 이제 세 살이 된 영화가 자기 팔꿈치에 뭐가 묻었다고 닦아 달라고 했다. 몽고반점이라고 알려주었지만 영화는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설명하려다가 이내 나는 말을 멈추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졌기 때문이다. 엄마가 말을 멈추자 영화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이의 눈을 보며, ‘나는 언제 이 말을 알게 되었지?’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이가 궁금해하는 사소한 것들을 알려주다 보면 너무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일수록 말문이 막힌다. ‘물이 뭐예요? 공기가 뭐예요?’처럼 쏟아지는 심오한 질문들.
그럴 때마다 내가 아는 만큼 알려주고, 더 깊은 질문에는 모르겠으니 같이 인터넷 검색을 하며 찾아보자고 한다. 나는 푸른 몽고반점을 휴지로 억지로 지우려는 영화 대신 휴지를 들고, 닦이지 않는다는 시범을 보여주며 설명한다.
“이건 점이야, 네가 크면 천천히 없어질 거야.”
나는 영화의 팔에 있는 푸른 몽고반점이 매만지며 벌써부터 아쉬웠다. 보드랍고 따뜻한 영화의 팔뚝은 참 말랑말랑했다. 간지러워, 영화는 몸을 비틀며 웃었다. 몽고반점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영화와 만났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