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어느날 갑자기 물었다.
엄마 우리는 부자야?
나는 그 말에 대해서 잠시 망설였다가.
부자는 아니야.
남편은 아이에게 다시 물어봤다.
너는 우리 집이 부자인 것 같아?
평화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할머니 집에 사니 부자는 아닌 것 같아.
평화가 말하는 할머니 집이란, 이렇게 오래된 할머니 같은 집에 사니 부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우리 집으로 오는 길에는 동네에 사는 많은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들도 있고, 보라색으로 염색을 하고 제법 멋있게 집을 고치고 주택생활을 즐기시는 분도 있지만, 재개발이 진행되어 새 아파트가 들어오자 더욱 같은 동네에 살지만 어떤 삶의 격차가 느껴진다. 바로 앞 아파트는 현재 우리 집의 시세와 비교해도 3-4배 이상은 넘는다.
여덟 살이 된 아이는 그것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지만, 체감할 수 있다. 아이들의 사이에서도 부모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경제력과 삶의 여유에 따른 위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십 대까지는 우리가 쟁취한 학벌이 우리의 훈장이었다면, 삼십 대가 되면 학벌보다 우선인 것이 바로 연봉이다. 일 년에 얼마를 벌며 얼마나 안정적인 직장과 집 땅 차를 소유하냐에 따라 서로의 계급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사이에서, 가끔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살림살이를 숨기는 경우도 있고, 실제보다 명품으로 허영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과연 숨긴다고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을까..
나는 숨기지 않는다. 딱히 부자라고도 가난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또 다른 놀림거리가 되기도 한다. 내가 가난하지만 당당한 주인공을 그리고 싶다고 하니... 글쓰기 스터디에서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요? 가난 포르노?
뭐? 그런 말이 있어?
그렇구나, 가난이 포르노가 된다니. 가난이 포르노가 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바로 상대방의 가난이 자신이 그나마 더 좋은 위치에 있다는 상대적 위안을 주기 때문일까? 아무리 그런 시선과 기능이 있다 해도, 나는 가난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가난을 긍정하는 문화에 대해서.. 비하하고 싶지 않다. 포르노라니... 싫다!
오래전부터 나는 나의 없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내가 없는 것인지 헷갈렸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배부른 소리이고, 누군가에게는 궁상맞은 이야기였으니까.
고민하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나 sns에 자신의 허름한 세간살이를 포장하지 않고 공개하는 사람들은 보며 느낀 안도감을 생각했다. 나는 나와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이 올린 다소 궁상스럽거나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꺼내면... 솔직히 처음엔 낯설었다. 이렇게까지 민낯을 까야하나 하면서도 왜 부끄러워하고 숨겨야하는 걸까 하는 반발심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꺼낸 그 분이 좋아졌다. 그 이야기가 내게 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 사실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라고 되묻고 싶었다. 나와 남편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이 생을 견뎌왔다. 그 과정들 중 부끄러운 부분도 있지만 이제는 그 이야기하고 싶다.
어젯밤 비가 내렸다. 남편은 옆방에서 혼자 꽃잠을 자면서 광고 회의에 발표할 아이디어를 계속 구상하며 이런저런 레퍼런스를 찾아보고 있었다. 나는 목이 말라 새벽에 일어났다가 우리 집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톡. 톡.
금세 머리 위로 흘러내릴 것처럼. 그러나 이미 경험상 알고 있었다. 비의 양도 적고, 이 정도로는 끄떡없었다. 날이 새고 고쳐도 충분하다. 남편에게 지붕에 커버가 고양이들 때문에 벗겨져 비가 새고 있다고 전했다. 새벽이 지나 날이 밝자, 남편은 지붕에 올라 벗겨진 지붕의 커버를 다시 씌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머리맡 지붕에 올라간 남편의 안간힘 소리를 들었다. 지붕의 커버가 끌리며 다시 제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빗방울 소리가 그쳤다. 그제야 나는 다시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