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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가연 Aug 30. 2022

여름의 속삭임

강북문화정보도서관 에세이를 부탁해 8월 '계절'

짙은 초록색 잎사귀는 여름이면 내게 바람에 속삭이듯 묻는다.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잘 잠들었냐고. 그 풀냄새가 창문을 타고 퍼지면 나는 아이들을 재운 뒤 그 잎사귀가 부비던 소리를 다시 떠올려본다. 쏴아아. 파도 소리처럼 바람에 흔들리던 잎들. 대낮에 아이들과 놀며 핸드폰에 찍어 둔 푸른 잎사귀들은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밤이면 나는 낮에 찍어둔 사진을 다시 넘겨본다.


쨍한 햇빛, 그 아래 그을린 아이들은 땀을 흘리며 싱싱한 나무 사이를 뛰어논다. 나는 아이들이 노는 것을 그저 구경하길 좋아한다. 그러고 있자면 그 장면이 한 장의 그림처럼 말을 거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살아 있다고. 이 생생함을 그대로 느껴보라고. 한참 보다 그 그림 속에 들어가 아이들과 땀 흘리며 뛰어 놀고, 또 쉬며 바라보기는 반복 한다. 땀이 흐르면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나는 상상의 세계에서 가상의 것들을 창작하며 한 때 '몸'을 사용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나 자신이 얼마나 곪아 가고 있었는지를 그 때는 잘 몰랐다. 얼른 목표를 이루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래서 가상의 세계와 내가 정한 이상을 위해 현실에 있는 내 '몸'을 방치 했다. 나는 고인 물에 갇힌 온실의 화초처럼 천천히 썩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움직여야 한다. 그 시절 이후 나는 늘 움직이고 싶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이 언제나 나를 부르기 때문이다. 엄마 일어나. 목말라. 오줌 마려워. 똥 마려워. 여기 간지러워. 배고파. 아이들은 내게 쉴새없이 일어나기를 요구한다. 그 소리에 나는 몸을 움직이며 수시로 현실로 소환 된다. 그렇게 현실의 족쇄로 나를 묶어준 아이들 덕분에 나는 조금씩 건강해질 수 있었다. 아이를 챙기다보니 그제서야 현실의 나도 챙기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어린 나를 위해 새 밥과 새 반찬을 매 끼니 만들어 주었다. 그 갓 지은 밥상 앞에서 '가연이 덕분에 나도 밥을 제대로 차려 먹는다'고 고마워했다. 본인이 차린 밥상의 공을 나에게 돌리던 할머니의 말이 내가 엄마가 되어보고나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챙길 수 있는 존재는 얼마나 나를 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느끼게 해주는가.


"엄마, 나 엄마 필요해."


둘째 영화는 자주 내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콕 집어 말해준다. 그 말만 하면 나는 번쩍 일어난다.


"어, 어 지금 갈께."


물론 여전히 '엄마 그만 좀 불러!' 라고 불평하기도 하지만. 사실 아이의 요구에 매번 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저항해도 아이는 끝없이 나를 부르고 그 부름에 움직여 내 몸은 이 여름 자주 뜨거워졌다. 그 열이 나를 통과하며 이 여름을 온전히 흘려 보내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뜨거운 태양처럼 두 팔로 나를 붙잡았고, 나무처럼 뿌리를 통해 물을 쭉쭉 빨아 먹으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난다. 나의 다리를, 배를, 가슴을 붙잡으며 점차 내 키를 넘어서 자라날 것이다. 아이는 나를 잡고 나보다 자라서 언젠가는 엄마 필요해 라는 말을 더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아버지에게 점점 그러듯이.


지난주 토요일 아버지와 동네 숲을 산책 했다. 저수지를 따라 산책로가 깔린 평탄한 숲 속은 시원한 나무 그늘과 익어 가는 도토리 열매가 굴러 다녔다. 첫째 평화와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숲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나는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보며, 교실에서 동갑인 친구들과 경쟁하는 평화의 모습이 떠올라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숲도 나무들끼리의 경쟁이 있어. 나무들을 햇빛을 받으려고 더 높이 자라거든. 서로 그렇게 자라나는데, 그 사이에서 담쟁이는 자기가 혼자 자랄 힘이 없어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도 하지. 자, 나무가 얼마나 키가 큰지 한번 봐봐."


아이는 내 말에 바닥만 보고 걷다가, 그제서야 나무를 올려다 본다. 앞서서 걷던 아버지는 나와 평화를 이야기를 곰곰히 듣더니 이야기를 보탠다.


"소나무를 타고 자라는 담쟁이를 가리키며, 이 담쟁이는 송담이라고 불러. 소나무에 붙어서 자라는 담쟁이는 약초로 쓰인데."


소나무를 짚고 천천히 자라나는 담쟁이, 송담은 뚜벅뚜벅 걷는 아이처럼 소나무를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아버지는 내가 재밌게 이야기를 듣자 만족한 듯이 다시 등을 돌리고 앞서 걸었다. 이 길이 좋으니 따라 오라는 듯. 어느새 아버지가 금세 칠순을 앞두고 있다니. 마흔을 앞둔 지금의 나는 이제는 아버지가 알려준 길로만 걷지 않아도 되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를 따라 걸어준다. 그 길이 이미 아버지가 알아둔 완벽한 길인 것을 믿기도 하지만,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이 여름,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여유 였을지 모르겠다. 때론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걸어주고, 때로는 나를 부르는 아이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 마음 말이다. 산책하다 제초기에 잘려나간 풀향을 맡을 때면 꼭 내 마음 같구나 싶을 때가 있었지만, 그런 자기 연민을 내려놓아보니... 어쩌면 그저 각자 조금씩 슬픈 것 뿐이었는데 혼자만 그렇다고 생각했나 싶다. 이제 내가 말해주고 싶다. 엄마도 영화 네가 필요해. 저도 아빠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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