꽹과리와 우쿨렐레

7월 '에세이를 부탁해' 강북문화정보도서관 동아리 모임 글

by 심가연


2006년 나는 대학교 새내기 때,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꽹과리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그 쨍쨍거리는 소리에 사로잡혀 '꽹과리를 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3월 신입생 오티를 하기 전부터 마음속에 쾅쾅 울려대더니, 오리엔테이션을 하러 간 장소에서 운명처럼 대학 동아리 풍물패를 마주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장구를 배우며 칭찬을 받았던 기억 때문일까? 신내림을 받을 것처럼. 꽹과리를 평소에 들을 일도 없던 내게 그런 소리가 들린 것은 지금도 미스터리 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마음에서 발화한 꽹과리 소리는 일주일에 삼일은 대학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술을 마셨던 내 모습과 닮아 있었다. 통금시간 9시를 꽉 채워 열심히 놀았다. 돌이켜보니 그때는 인생에 다시 없을 황금기였다. 젊고 풋풋했던 친구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던 술자리는 지금도 한 번씩 꺼내보는 내 마음속 사진 한 장이 되었다. 술자리 위에 떠 있던 아름다운 조명을 받던 친구들의 얼굴은 늙지도 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일주일에 3일은 동아리 선배들을 따라 술을 먹다 보니, 무리긴 무리였나 보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볼에 커다란 여드름이 나 있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옆에서 한 잔 두 잔 마시던 술의 결과가 이거였구나. 그 뾰루지를 바라보다가 너무 달렸던 건 아닐까 반성하며 술자리를 줄이기 시작했다. 몸의 신호는 언제나 정확하니까.


꽹과리를 울리며 살고 싶었던 새내기 시절, 풍물패만큼은 아버지가 반대하셨다. 풍물패는 절대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냐고 물어보니 아빠가 어린 시절에 풍물은 상놈이 하던 것이라고 했다. 뭐야 그게 요즘 세상에 무슨 말 같지 않은 이유인가 싶었지만, 그 당시에는 무서웠던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아버지를 거스르고 풍물패를 들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대신 학교 교지편집부에 들어가서 동아리 장학금을 벌면서 교지를 만들게 되었다. 06학번이던 내가 새내기 시절일 때는 학교에서 등록금을 내리라는 학생들의 시위가 많았다. 타 대학 이야기지만 사립대 학생회장은 머리를 삭발하고 삼보일배 시위를 하고, 그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 대학에서 5-6만 원씩 돌려주기도 했었다. 우리 대학에서도 한 번은 크게 시위가 열린 적이 있었는데 이를 취재하기 위해 학생들 시위 현장을 가보니, 아버지가 왜 풍물패를 반대했는지 알게 되었다.


풍물패는 시위대의 최전방에 있었다. 북을 치고, 장구를 두들기면, 그 소리를 따라 학생들이 주먹을 들며 모여들었다. 그 모임의 지휘자처럼 가운데 꽹과리를 든 리더가 열심히 장단을 맞추며 사람들이 이동할 방향을 지시하고, 전체 음악의 속도와 긴장을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꽹과리는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았어도 나하고는 맞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아리를 탐방차 방문해보니 내성적인 나에게는 적응하기 꽤 어려운 분위기였다. 꽹과리를 치겠다는 열망은 풍물패 동아리를 다녀오고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대신 나는 학생운동을 하던 동아리 선배들과 교지편집부에서 만나게 되면서 내 정치적 견해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나는 어느 편에서 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내가 앞으로 살면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태도를 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2006년은 광우병 소고기로 시끌벅적했다. 그때 학생회 선배가 북한 금강산에 학생들이 함께 가는 행사가 있으니 갈 생각이 있냐고 했다. 7만 원 정도면 금강산을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북한이라는 곳을 가보고 싶었다. 말로만 전해 들었던 곳이니까. 어쩐 일인지 외박만은 안 된다던 아버지가 그 여행을 허락했다. 나는 신나게 짐을 싸서 금강산으로 떠나게 되었다.


어느 겨울, 서울의 북부권 대학생들이 모인 커다란 관광버스를 타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삼팔선을 넘어 총을 든 군인들을 마주할 때는 우리가 휴전 국가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곳을 지나 도착한 금강산은 관광지역이다 보니 긴장감은 조금 낮아졌지만, 돌산에 새겨진 북한 인민들을 위한 붉은 문구들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운 금강산 돌 자락마다 새겨진 문구들은 기괴했다. 금강산을 오르다 만난 어린 북한 군인들은, 우연히 마주친 여대생을 힐끔 거리며 수줍게 지나쳤고, 선임들은 어린 북한 군인들에게 얼른 뛰어가라고 눈치를 주었다. 그때 우연히 등산을 하다가 만난 한 북한 사람은 자신은 글을 쓰는 작가라고 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한국어를 쓰기에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멀게만 느껴졌던 북한 사람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머리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도 실제로 체험하면 그제야 받아들이게 된다.


금강산의 한 대중탕이 있는 대형 숙소에서 학생들과 술을 마셨다. 북부 대학생을 모아놓은 이 모임에 한 대학생 주최자가 나서 강연을 시작했다. 이 때 알 수 없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는데 언론에서 말하는 것보다 북한이 잘 살고, 북한 사람들이 고등 교육을 많이 받고 있는다는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북한을 찬양하는 이야기였다.


'저렴하게 금강산을 구경하려던 모임이 알고 보니 이런 교육을 받는 곳이었구나.'

그제서야 나는 이 여행을 목적을 눈치채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단돈 7만 원에 금강산을 구경하겠다고 쫓아왔다니 2022년 현재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위험한 결정을 한 것 같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어느 정도 내 정치적 견해를 굳히게 되었는데, '정치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상황에 따라, 사안에 따라 내 입장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며 우리나라의 입장과 세계관으로 세상을 대할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서 있는 공동체가 나를 지키고 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대학에 오기 전에는 '입시'라는 허들을 넘기 위해 쳇바퀴만 돌았다면, 대학에 와서는 그렇게 꽹과리처럼 세상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왜 싸우는가? 시위를 하고 소리를 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치인은 왜 저런가? 그 사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에 대한 끝없는 질문들은 나 한 사람이 세상을 향해 작게 울리던 내 마음속 꽹과리였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 역할을 맡았던 김명민 배우가 한 대사에서 찾았다.


<육룡이 나르샤 출처:/ SBS '육룡이 나르샤' 캡처>

“정치는 나눔이고 분배다. 정치는 결국 누구에게 거둬서 누구에게 주는가 하는 문제다”


정치가 분배였구나. 이권을 어떻게 나누는가에 따라 좌와 우와 나뉘고, 그것으로 대립하게 되는 것이구나. 이 말 한마디로 단박에 이해되었다. 지금도 나는 세상을 바라볼 때,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이 사건을 통해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보았는가. 따져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시절 꽹과리 소리가 내게 세상의 싸움에 대해 알려줬다면, 대학교를 졸업하던 시기 취직자리를 알아보며 혼자 눈물을 훔칠 때 이 노래가 찾아왔다. 바로 하와이안 뮤지션 IZ의 우쿨렐레 반주가 깔린 오버 더 레인보우 over the rainbow 였다. 카페에서 토익공부를 하며 들었을까 어느 순간 내 마음에 박혀버린 노래를 그 당시 싸이월드 배경음악으로 무한 재생되었다. 하루하루 피가 마르게 토익공부를 하고, 사무보조를 하며 가습기에 물을 채우던 시절 온 동네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뿌렸다. 그 타들어가는 속에 촉촉하게 내리는 비처럼 우쿨렐레는 심금을 울렸다. 우~~ 우~~ 우.... 오 버 더 레인 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려주었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우쿨렐레의 목소리를 따라 나는 우쿨렐레 속 행복 네이버 카페에 가입했고, 10만 원짜리 우쿨렐레를 하나 사서 타브 악보로 4줄짜리 우쿨렐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6줄짜리 기타는 가지고 다니기도 무겁고 쇠줄이 손톱 밑으로 파고들어, 꽤 손이 작은 나에게는 버거워서 번번이 포기했었다. 그러나 우쿨렐레는 통통 튀는 음률에, 클래식 기타용 아크릴 줄로 손도 아프지 않았다. 게다가 우쿨렐레의 음색은 아기의 목소리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드디어, 내 인생의 악기를 찾았다.


https://youtu.be/V1bFr2SWP1I

over the rainbow-iz


영상 속 거대한 덩치의 하와이안 가수와 함께 나는 방구석에서 작은 우쿨렐레를 가슴에 안고 노래를 불렀다.

취직은 못하고 한가롭게 집에서 띵가띵가 거리는 나를 가족들은 베짱이라고 놀렸지만,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혼자라도 살아남기 위해 부른 노래였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원하지 않는 직장에서 원하는 않는 일을 할 것인가, 끝까지 '글'을 쓰는 삶을 살 것인가. 내 인생에서 지키고 싶은 열렬한 소망 때문에 괴로웠다. 글쓰기로 직업을 구하는 과정에서 내가 원하는 직장과 연봉, 명쾌한 답은 없었다. 부모님은 번듯한 직장으로 가라고 했고, 나는 글쓰기를 고집했다. 그 중간점을 찾아가기 위한 부침을 견디는 동안 우쿨렐레는 내 옆에서 함께 줄을 튕기며 울려주었다. 내 목소리를 귀 기울여 주는 존재. 나는 우쿨렐레를 아기처럼 꼭 안고 손목을 흔들며 업다운 업 다운 스트로크를 하며 내 리듬을, 내 속도를 고집했다. 부모의 기대에 맞춰 이번만큼은 내 악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지금도 나는 글을 쓰며 살아가게 되었다. 가수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처럼 인생을 살게 된다고 한다. 예언처럼 울리던 내 마음의 노래들은 언제나 나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었다. 아직 다음 노래가 들리지 않으니 조용히 귀를 기울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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