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면서 학교나 직장이 가까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무릇 경기도민의 삶이 그러하겠지만 고등학교는 45분, 대학은 1시간 30분, 지금껏 다닌 세 개의 직장은 평균 1시간 45분의 거리에 있었으니(물론 편도 기준이다) 20대 가용 시간의 25% 정도는 대중교통에 썼다고 봐도 무방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3개월 간 프로젝트성으로 진행되는 커뮤니티 기숙사의 입주 공고가 떴을 때 열일 제쳐두고 지원서를 써냈고, 드디어 통근시간을 2시간에서 2분 30초로 바꿔내는 데 성공했다.
아파트 뒤로 드넓은 논이 펼쳐지는 경기도 외곽을 벗어나 연예인이 줄지어 산다는 서울숲 아파트 뒤편에 둥지를 틀었을 땐 3개월짜리 수학여행을 떠나온 듯 즐거웠다. 아직 겨울의 찬기가 가시지 않은 3월 초에 서너 개의 뚱뚱한 짐 더미를 낑낑대며 옮기면서도 콧노래는 그칠 줄을 몰랐다. 단출한 이사를 마친 뒤, 유명한 서울숲 맛집에서 바질 페스토를 쏟아놓은 듯한 파스타를 돌돌 말아먹던 저녁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인스턴트 자취가 시작되고 맞이한 진짜 변화는 단지 물리적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대중교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던 나에게 생긴 한 가지 부작용을 몸소 깨달은 것이다. 어느새 나의 시간이 분 단위가 아니라 시간 단위로 흐르고 있었다는 것과 하루가 24시간을 꼬박 채우지 못한 채 억울한 심정으로 물러나고 있었다는 것 알게 된 후, '하루'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도 조금씩 변화했다.
하루는 생각보다 길었고, 한 시간 단위로 쳐내버리기엔 분단위로 끼어드는 일상이 생각보다 알찼다.자칭 ‘문학소녀’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동안 멀리했던 독서도 10분, 20분을 쪼개어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언제 해 먹고, 그걸 또 언제 치우나’하는 마음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요리도 난생 처음 진지하게 시도해보았다.(요즘 제일 자신 있는 건 참치김치찌개다) 무엇보다 ‘시작해야지, 이제는 써야지’하던 글을 비로소 쓰기 시작해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점은 대단히 고무적인 변화이기도 하다. 브런치 작가가 되려면 하루 세 시간은 꼬박 글만 써야 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발행한 지난 7편의 글은 출퇴근 전후로 야금야금 써 내려간 글들이다.
해보지 않은 경험은 다양한 불신을 낳는다. 내 월급에 나가서 사는 건 꿈같은 일이겠지, 사실 지하철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은 많은데 내가 게을러서 안 하는 걸 지도 몰라 등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만 갇혀서 시도해보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것들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지하철에 앉아 2시간 멍 때리기도 거뜬하게 해내던 내가 1분 1초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어느새 익숙해져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흘려보내던 시간이, 내 청춘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내 집 마련을 위해 저축을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이나 얼른 일을 마치고 돌아가 쓰고 싶었던 글을 구상해야지 하는 생각들은 내가 이전에 결코 해보지 않았던 생각들이다.
나는 약 3주 뒤 다시 경기도민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얼마 전 오랜만에 퇴근길 지옥철에 몸을 실었다가 잠시간 잊고 있었던 끔찍함이 되살아나 아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짧은 자취를 경험하며 내가 느낀 것은 소위 ‘저녁이 있는 삶’은 비가역적 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통 크게 후려치며 지나가던 시간이 사실은 조각조각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느낀 후, 10분 단위로 할 수 있는 일들에도 의지가 불끈 생겨난다.
먼 미래보다 지금 당장의 하루에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고, 나를 위한 요리를 간간히 해가며 오늘의 나를 좀 더 보살피겠다는 다짐이다. 그리고 3개월 뒤에 다시 돌아갈 거, 그런 자취를 왜 하냐고 말했던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 이게 또 제 인생의 분기점이 되네요.'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