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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새해 Jul 13. 2020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조용한 일 ㅣ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가만히 좋아하는 중-


      

                          

감기 기운이 있어 작업실에 나가지 않았다. 요즘은 열이 조금만 있어도 무섭다. 주변 사람들 신경 쓸까, 오늘치 약속을 취소하고 화이투벤 먹고 계속 잤다. 자다가  하루가 저물었다. 하루가 아니라  한 해가 이렇게 문득  저물 것 같은 서늘한 느낌.


미열은 사라졌고 장마가 걸쳐 있는 눅눅한 저녁,   손 가는 데로 마음 가는 데로 시집 한 권 뽑아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이때 시는 슬며시 곁에 내린 낙엽처럼 고마운 존재,  내가 시를 열심히 읽어  세상을 이롭게 할 수는 없겠으나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시집 한 권으 내 마음은 고요를 회복할 수  있다. 김수영 백석 이성복  김명인 김사인  최승자 김혜순 이문재 기형도 장석남 함민복 허수경 손택수 심보선 김경주 박준 오은 좋아하는 시인이 많다는 건 때로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지.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은 김사인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화려하고 어렵고 폭발적인 시어는 없다. 섬세하고 연민하는 착한 눈의 시인이 있을 뿐.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ㅣ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 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 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이성선 시인(1941 ~2001)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좋아하는 시를 만나 필사를 할 때마다 이 시가 떠오른다. '하느님/가령 이런 시는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 주실 수 없을까요' 김 사인 시인이 이성선 시인의 시를 옮겨 적으며 하느님께 너스레를 떠는 대목이 우습기도 하고 남의 시로 뚝딱 시 한벌 짓는  솜씨가 기발하기도 하고 , 그보다는 떠나간 사람을 추억하는 방식이  참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성선 시인의 시집을 따로 읽어 본 적은 없지만 위 시에 인용된 (다리)라는 시와 (별을 보며)라는 시만 봐도 그가 어떤 심성의 시인 일지 짐작할 수 있다.


시 쓰기는 생을 연금(練金)하는 , 영혼을 단련하는 오래고 유력한 형식이라고 믿고 있다.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시인의 말 중에서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 말아'달라는 시인의 부탁이 마음에 남는다. 꼭 시가 아니어도 나 아닌 누구에 대해, 무엇에 대해 ,  앞 뒤 맥락에 대해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버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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