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새해 Jun 28. 2020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페르난두 페소아 2

나는 금사빠다 , 달콤한 초콜릿에 빠지듯 금방 사랑에 빠진다. 음악, 그림, 책, 영화, 구름, 꽃, 아이돌, 바이올린 연습, 노래 연습, 글씨 연습, 허다 못해 잉크나 펜에도 빠진다. 그때그때 온갖 것에 다 빠진다. 빠져서 다른 것은 모두 뒷전이 되곤 한다.  무엇에 빠져 있을 때에만 나는 허무로부터 고요할 수 있다.  요즈음 페소아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페소아가 만들어 낸 인물 중, 모더니스트 알바루 드 캄푸스 (ALVARO DE CAMPOS)의 시를 묶은 시집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는 페소아의 다른 이명 알베르투 카에이루의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과는 전혀 결이 다른 시집이다. 시에서 기계소리 고함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거침없고  질주하는  자동차 같다. (해상 송시)는  시 한 편이 100페이지를 넘어가기도 한다.


오늘은 아무 생각 없는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100페이지가 넘는 시를 읽기에 적당한 날이다.




담배가게  TABACARIA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영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가 되기를 원할 수조차 없다.

이걸 제외하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꿈을 품고 있다.


(중략)


나는 모든 것에 실패했다.

아무런 목표도 세우지 않았기에, 어쩌면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집의 뒤편으로 난 창문을 통해

나는 내가 배운 교훈으로부터 내려왔다.

큰 뜻을 품고 시골까지 갔으나,

거기서 발견한 건 그저 풀과 나무뿐,

어쩌다 사람이 있다 싶으면 남들과 다를 바 없었다.

창가를 떠나, 나는 의자에 앉는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


(중략)


이 세계는 정복하려고 태어난 자를 위한 것이지

정복할 수 있다고 꿈꾸는 자를 위한 게 아니다, 설사 그들이

  맞다 해도.

나는 나폴레옹이 이룬 것보다 더 많이 꿈꿨다.

나는 가상의 품에 예수보다 많은 인류애를 품었다.

나는 그 어떤 칸트도 쓰지 못한 철학들을 비밀리에 만들어

  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리고 아마 영원히, 다락방의 아무개,

비록 거기 살지는 않지만,

나는 항상 무언가를 위해 타고나지 않은 사람일 것이고,

나는 항상 단지 자질은 있었던 사람일 것이며,

나는 항상 문 없는 벽 앞에서 문 열어 주길 기다린 사람일

   것이다


(중략)


(어린 소녀야, 초콜릿을 먹어,

어서 초콜릿을 먹어!

봐, 세상에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모든 종교들은 제과점보다도 가르쳐 주는 게 없단다.

.......)


(중략)


그런데 담배 가게 주인이 나타나서 문가에 선다.

나는 머리를 반쯤만 돌린 불안한 자세로, 또

반쯤만 이해된 영혼의 불편한 심기로 그를 바라본다.

그도 죽겠지 그리고 나도 죽겠지.

그는 간판을 남기고, 나는 시를 남기겠지

언젠가 때가 오면 간판도 죽을 것이고, 시도 마찬가지.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간판이 있던 거리도 죽겠지,

그리고 내가 시를 쓴 언어도.

이 모든 게 벌어진 회전하는 행성도 죽겠지.

다른 행성들의 다른 행성계에서는 사람 비슷한 무언가가

계속해서 시 같은 걸 지을 테고, 간판 같은 것 아래 살겠지.


(중략)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중)


 



가장 명징하고 정확하게 삶과 인간을 관찰하고 묘사하기 위해 폐소아는 자아 정체성의 한계를 확장하고 넘어서려 했다  - 심보선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추천의 글 중 -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페르나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민음사
매거진의 이전글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