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을 오가며 지나다니는 그 집 앞에 능소화가 만발했다. 할머니와 꽃이 함께 사는 집이다. 나는 가끔 그 집 마당으로 기웃기웃 들어가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곤 했다. 사진을 찍어도 되나 여쭈면 '별일이야, 뭐 볼 게 있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사진을 찍나 몰라'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이리 와봐요 저리 와봐요 꽃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마당에 채송화가 지저분해 다 뽑아 버리려다 사람들 사진 찍으라고 조금씩 남겨두신다고도 했다. 나는 잘하셨다고 했다.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약속도 했다. 할머니, 제가 사진 뽑아서 가져다 드릴게요. 꼭!
ⓒ새해
비가 온 다음날이면 꽃이 한참 지고 또 한참 남아야 하는데 어느 날 그 집 앞 능소화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나? 궁금 했는데 이웃에게 물어보니 할머니는 어디로 이사를 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능소화가 사라진 그 집은 동네와 잘 어울릴만한 예쁜 가게로 변신을 했다.알고 보니 열몇 살에 시집와 육십 년 넘게 사셨다는 낡고 주름진 그 집이 할머니 소유가 아니었단다. 할머니는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던 정든 집을 떠나셨고 나는 꼭 가져다 드리겠다던 사진을 가져다 드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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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밤,생각난 듯 그 집 앞 사진을 꺼내 본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깟 흔한 사진이야 어쩌면 할머니가 더 먼저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할머니가 떠나고 싶지 않은 집을 억지로 떠나셨다는 뒷얘기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어찌하랴 집주인도 사정이 있었겠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슬퍼하면 세상을 살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일이 마음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면 그건 또 얼마나 잘 사는 일일까 . 혼자 북치고장구도 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