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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새해 Dec 28. 2019

한가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월급쟁이 시절,  디자이너로, MD로, 나 아니면 회사가 망하는 줄 알던 때, 내겐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비행기나 기차를 타면 괜스레 눈물이 났다. 출장길이건 여행길이건 떠날 때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비장해지거나 서러운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비행기나 기차에서만이 아니다. 전주식당에서 대구탕을 먹다가 청담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야근을 마치고 문득 하늘을 보다가 기습적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은 이주일 출장 일정을 마치고 뉴욕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귀가 먹먹해지면서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쏟아졌다. 예상한 일이었으므로 당황하지 않았다. 코를 훌쩍이며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고 있을 때 옆 좌석에 앉은 여자가 티슈를 건네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도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깐 멋 적은 웃음을 웃고 다시 각자 울음을 계속했다. 승무원들은 우리가 함께 장례식에라도 다녀오는 줄 알았으리라.

  

그녀가 변심한 남자 친구 얘기를 시작한 건 내가 울음을 그치고 한참 뒤였다. 그동안 나는 커피를 한잔 마시고 머릿속으로 출장보고서를 기안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일을 하는 벨기에 출신 수영복 디자이너라고 자신 소개했다. 나는 그녀의 얘기를 충분히 알아듣지 못했다. 내 영어 실력이 훌륭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그녀는 많이 흥분해 있었고 남자 친구에 대한 분노와 욕설이 가득한 말이었다. 그녀의 분노에 나도 덕끄덕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리고 다음은 내 눈물을 설명할 차례였지만 설명할 길이 없었다. 실은 내가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가 내 손을 잡고 큰 눈을 글썽이며 “I know, I know”를 반복했다. 이번엔 그녀가 나 때문에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대체 나도 모르는 슬픔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아무 공통된 이유도 없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이 울고 있던 그녀가  세상 그 누구보다  마음을 편하고 따뜻하게 해 주었지만 누군가의 위로로 규명될 슬픔이 아니었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일도 제법 잘하는데, 나는 왜 계속 슬플까?  


 오래 버티지 못했다.   마흔이 되기도 전에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평생 동안 나누어 써야 할 힘을 이미 다 써버린 것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이 찾아왔다.

  

  그리고 긴 침잠의 시간을 보낸 후 깨달았다. 그동안  나의 머릿속은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는 것을. 일 할 때뿐 아니라 쉴 때도 무언가 늘 채우기에 급급했다. 를 배우고  를 배우고 크로키를 배우고 밀화를 배우고 여행을 가서도  명상을 우러 가서도  한가하게 내버려 두는 마음이 없었다. 누가 나를  좀 잠가주었으면 싶을 만큼.


모든 것은 왜 다 끝나야 보이는지. 제 와 생각해 보면 나는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온전히 한가하게 앉아 볕이나 쬐면서 나는 왜 슬픈가? 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가?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견딜 수 없는가? 지루하게 물었어야 했다. 우고 채우고 다시 비우는 법을 알았더라면 외국어 원이나 대영박물관이 아니라 햇볕이나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에게서 어쩌면  쭈욱 버틸 힘을 얻었을지 모른다. 나지 않고도 삶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 바쁜 세상에 마냥 한가롭기만 한 삶을 예찬할 순  없지만  누군가 한가하게 살지 았다고 ,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고, 돌아봄 없이 당당할 때  나는 말하고 싶어 진다. 그러니까,  한가해 보셔야 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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