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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이 총이 되던 시대: 언어와 저항의 기록

말을 모으고 지킨 사람들, 조선어학회

by 온기록 Warmnote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쓰는 모든 말을 금지당한다면? 가족과의 대화, 친구와의 농담, 당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던 메모들까지, 입 밖에 내는 순간 경고를 받고, 감시를 당하고, 벌을 받게 된다면? 그런 상상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과 백 년 전, 이 땅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어는 서서히 공적 공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 수업 시간이 줄어들었고, 관공서에선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조선어로 발행되던 신문과 잡지는 강제로 폐간되었고, 일본어로만 발행되는 매체들만 허용되었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말할 수 없는 침묵과 일본어만 남았다.


말은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고, 감정을 조율하는 방식이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다리다. 사람은 말로 존재하고, 말로 세계를 만든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언어를 통제한다는 건, 표면적인 정책 하나가 아니라 존재의 토대를 흔드는 일이다. 일제가 조선어를 지우려 했던 것은, 그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공동체의 기억을 지워내고, 생각의 틀을 바꾸고, 결국 정체성 자체를 흡수하려는 시도였다.


조선어학회와 '사전'의 의미


말을 금지당한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단어를 모으기 시작했다. 1931년 조직된 조선어학회는 조선어 문법을 정리하고, 단어를 수집하며, 사전을 편찬하려 했다. 그것은 단순한 학술 작업이 아니었다. 지워지는 언어를 기억하려는 일, 사라지는 민족의 숨결을 붙잡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말을 모은다는 뜻이고, 말을 모은다는 것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을 기억한다는 뜻이다. '사전'이라는 단단한 책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 감정, 노동, 관계가 담겨 있었다. 당시 조선어학회가 만들려 한 것은 단어의 목록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존재의 증거였다.


결국, 조선어학회는 해산당하고 주요 인물들은 체포되었으며, 사전이라는 이름의 투쟁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단어 하나하나에 깃든 그들의 시도는 지워지지 않았다. 기록은 살아남았고, 말은 이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말하고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내려 했던 누군가의 의지와 마음이 담겨있다.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 말로 이어지던 삶의 경계였다. 사전은 곧 국경이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우리 민족의 이름이었다.


언어를 지킨다는 것: 작고 사적인 말의 저항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조선어는 사라지지 않았다.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조선말로 물건을 사고팔았고, 집 안에서는 아이들이 조선어로 부모와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는 일기장에 조선어로 자신의 하루를 기록했고, 누군가는 몰래 조선어 책을 복사해 이웃에게 건넸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익숙한 말로 생각했고, 그 말로 사랑하고, 그 말로 위로받고, 그 말로 하루를 견뎠다.


말은 그렇게 살아 있었다. 국가가 언어를 통제할 수는 있어도, 말이 흐르는 입과 마음까지는 지배할 수 없었다. 거창한 선언도, 집단적 투쟁도 아니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졌던 그 말들은 침묵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언어를 지킨다는 것은 그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작은 다짐들의 연속이었다. 검열을 피해 조심스럽게 꺼낸 한마디, 들키지 않도록 감춘 필체, 금지된 책을 숨겨두던 서랍. 그 모든 순간이 곧 저항이었다. 그 조용한 말들이 모여,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문장을 만들었다.


우리가 쓰는 말, 그들의 지킨 말


우리는 별생각 없이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생각을 정리할 때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할 때도, 무언가를 설명하고, 누군가와 다투는 순간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꺼내 쓴다. 하지만 이 말들이 언제나 이렇게 당연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단어 하나하나를 모아 사전을 만들려 했다. 그들이 그렇게 지켜낸 말들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어졌다. 우리가 매일 쓰는 인사말과 감탄사, 지역마다 다르게 남아 있는 말투, 사라졌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말들 속에는, 우리의 선조들이 지켜낸 마음과 흔적이 담겨 있다.


말은 세대에서 세대로 건너가며, 우리는 그 말들 위에서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많은 말이 잊히기도 하지만, 어떤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그 말들은 스스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지켜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속에는, 그들이 지켜낸 말이 있다.
그 말 위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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