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해서 더 오래 남는 것들
예전에는 여행을 다녀오면 사진 몇 장을 인화해 앨범에 넣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굳이 사진을 찍지 않았고, 찍은 사진은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다시 꺼내보게 되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손에 든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순간이 기록되고, 그 기록은 쉽게 쌓여만 간다. 특별히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어느새 기록은 차곡차곡 남는다.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추억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별일 없던 하루에도, 휴대폰에는 사진과 영상이 수북하다. 예전처럼 한 장의 사진을 아끼거나 고르느라 망설일 필요도 없다. 찍고, 남기고, 다시 보고, 또 공유하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순간순간을 빠짐없이 담았지만, 정작 기억은 금방 흐려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무리 또렷하게 남겨도, 마음은 그 장면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오히려 흐릿했던 그 시절의 추억들이 더 자주 떠오른다. 많이 남기지는 않았지만 오래 기억에 남고,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에는 깊게 남아있다.
예전의 사진은 말 그대로 '한 장'이었다. 그 안에는 장면뿐 아니라, 찍는 사람의 마음, 찍히는 사람의 표정, 그리고 그 순간의 공기까지 함께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사진은, 찍힌 것보다 찍히지 않은 것을 더 많이 떠오르게 한다.
정지된 사진은 말을 아끼는 기록이다. 장면은 멈춰 있지만, 그 안에는 소리도 있었고, 표정 뒤에 숨어 있는 감정도 있었다. 우리는 그 멈춘 장면을 오래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그때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된다. 장면 사이에 비어 있는 여백이 많았기에, 오히려 마음은 그 자리를 채우며 더 깊이 남았다.
앨범 속 사진 한 장을 꺼내면, 그 시절의 감정까지 되살아나는 느낌이 든다. 분명히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데도, 그 사진은 나를 다시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오래된 사진은 '정확한 기억'을 불러내기보다는, 그 장면을 지나던 마음의 온도를 떠올리게 한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기록되는 시대에는, 그런 여백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이상하게 감정은 흐려진다. 사진 한 장이 주는 조용한 여운이 그리워지는 순간들이다.
요즘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어도 영상을 찍는다. 길을 걸으며, 밥을 먹으며, 친구와 대화하는 사이에도 짧은 영상이 쌓인다. 소리도, 표정도,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빠짐없이 담긴다. 덕분에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선명한 기록들 속에서 정작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은 별로 없다. 다시 보면 웃기고, 반갑고, 그때의 기분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가도, 금세 다음 장면에 밀려 사라진다. 영상은 모든 것을 담지만, 그 안에 마음이 머무는 자리는 생각보다 좁다.
장면은 많고, 기억은 얕아졌다. 너무 쉽게 남길 수 있어서인지, 하나하나를 오래 바라보는 시간은 줄었다. 다시 보는 순간조차도, 감상보다는 소비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린다. 기록은 점점 더 선명해지지만, 그 선명함이 감정을 대신해주진 않는다. 영상은 시간을 그대로 붙잡아두지만, 붙잡는 것만으로는 추억이 되지 않는다.
기억을 남기는 방식은 분명 달라졌다. 예전에는 몇 장 안 되는 사진을 오래 바라보며 떠올렸고, 이제는 짧은 영상 수십 개를 손가락으로 넘기며 다시 본다. 남길 수 있는 것도, 꺼내볼 수 있는 것도 많아졌지만, 그만큼 하나하나에 머무는 시간은 짧아졌다.
사진이든 영상이든, 결국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이 남겼는가'보다 '무엇이 마음에 남았는가'일지 모른다. 가끔은 선명하지 않아서 더 따뜻하게 남는 기억도 있다. 흐릿한 장면이 더 오래 기억되고, 오래 바라본 한 장이 짧은 영상 열 개보다 더 깊게 남을 때가 있다.
기술은 앞으로도 기억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정작 오래 남는 건, 마음이 오래 머물렀던 장면들이다. 그 선명함은 기록이 아니라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