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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은 정말 예의를 담고 있을까?

높임의 언어, 낮아지는 사람들

by 온기록 Warmnote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려 할 때, 말의 내용보다 말투가 먼저 신경 쓰일 때가 있다.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어투가 너무 가볍게 들리진 않을까. 말 한마디에 태도와 인격이 담긴다는 말처럼, 우리는 종종 '어떻게 말하느냐'에 과도하게 집중하게 된다.

한국어에는 '존댓말'이라는 고유한 언어 장치가 있다. 상대의 나이, 지위, 관계에 따라 말투가 달라지고, 그것이 곧 예의의 기준이 된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말해왔기에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때때로 이 체계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존댓말은 정말 모두를 배려하기 위한 언어일까? 아니면 관계의 위계와 거리를 은근히 유지하기 위한 장치일까? 너무 익숙해서 묻지 않았던 그 질문을, 이제는 한 번쯤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예의의 얼굴을 한 위계


존댓말은 흔히 예의를 표현하는 말로 여겨진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나이가 많은 상대와의 대화에서, 일정한 거리와 조심스러움을 만들어주는 언어다.

하지만 이 체계는 언제나 평등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은 반말을 섞어 써도 괜찮지만, 어린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아래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존댓말을 써야 한다. 존댓말은 겉으로는 정중함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관계의 위계를 고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 안에서 예의는 자발적인 태도가 아니라 지켜야만 하는 규칙처럼 느껴진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말투를 고민하게 되고, 상대가 불쾌하지 않도록 신경 쓰는 일이 대화의 중심이 된다.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사회. 말투 하나로 사람이 판단되기도 한다.

존댓말은 질서를 만든다. 하지만 그 질서는 모든 관계를 평등하게 연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람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고, 그 거리를 고정해 버리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예의는 말끝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영어에는 상대를 높이거나 낮추는 문법이 없다. 누구에게나 'You'를 쓰고, 존댓말에 해당하는 말투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투는 같지만, 예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언어에 높임이 없다고 해서,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런 구조는 언어를 통해 위계를 표현하는 한국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어권에서는 상사나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친구처럼 말할 수 있다. 말의 높낮이보다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하느냐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말하느냐가 예의가 되는 문화. 한국어 사용자에겐 조금 낯설지만, 분명 다른 방식의 존중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준다.


존댓말은 벽일까, 다리일까?


존댓말은 정중하다. 하지만 그만큼 거리감이 있다. 말을 높인다는 건 일종의 선을 긋는 일이고, 그 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말을 놓자는 말이 오가기 전까지는, 아무리 가까워져도 마음을 터놓기 어려운 벽이 된다.

그렇다고 존댓말이 항상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존댓말은 서로 간의 불편함을 줄이고, 조심스러운 관계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서, 혹은 서로 입장을 가늠하기 어려운 순간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언어가 되어준다.

그리고 존댓말은 친밀해지는 '과정'을 만들어주는 언어이기도 하다. 처음엔 높임말로 시작되더라도, 어느 순간 말을 놓게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 변화는 그만큼 관계가 깊어졌다는 신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존댓말은 단지 거리를 만드는 말이 아니라, 가까워지는 흐름을 만들어가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존댓말을 놓지 못할까?


존댓말은 때로 말을 어렵게 만들고, 사람 사이에 선을 긋는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처음부터 반말로 시작된다면, 우리는 과연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을까?

존댓말은 거리를 만들지만, 그 거리 속에서 관계가 자란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높임말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때 비로소 마음도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존댓말은 친밀함을 만들어가는 흐름이자, 관계를 조율하는 언어다.

그래서 존댓말은 단지 형식적인 예절이 아니라, 관계를 조율하는 문화적 장치에 가깝다. 다만 묻고 싶다. 그 말투는 정말 서로를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가 존댓말이라 믿고 써온 것들이 때론 벽이 되고, 때론 다리가 된다. 따라서 그 언어를 언제, 어떻게 쓸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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