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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입식 교육이 만든 틀, 그 밖을 상상하다

틀에서 벗어난 생각은 틀린 게 아니다

by 온기록 Warmnote

우리는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틀리지 않는 법'을 먼저 배운다. 교과서에는 이미 누군가의 생각이 정답처럼 인쇄되어 있고, 시험문제에는 하나의 정답만 존재한다. 그 답을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정확하게 고르는지가 곧 '공부 잘하는 아이'의 기준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질문하는 법을 잃고,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누군가의 판단에 기대는 데 익숙해진다.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생각을 꺼내는 순간, 교실은 그것을 반기지 않는다. 창의적인 발상보다는 예상 가능한 답이, 새로운 관점보다는 모범답안이 환영받는 분위기. 주입식 교육은 그렇게 교실을 정해진 답을 빠르게 찾는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정답만을 외우는 학생들, 갇힌 창의성


주입식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학생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외우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자신만의 논리를 펼쳐보는 과정은 배움의 본질이다. 하지만 정답을 빠르게 맞히는 것이 중요해진 교실에서는 그런 과정이 비효율로 여겨진다.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해답을 기억하는 것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창의성은 질문에서 시작되지만, 지금의 교육은 질문이 자랄 공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교사의 설명은 곧 정답이 되고, 교과서의 문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준이 된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도, 그것이 평가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면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그렇게 질문은 점점 줄어들고, 다른 관점은 교실 안에서 자리를 잃는다.

창의성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가능성이고, 적절한 환경만 주어지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실은 그 가능성에 물을 주기보다는, 일정한 틀 안에만 머물도록 유도한다. 주입식 교육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 아이들을 만들어낸다.


문학에도 정답과 오답이 존재하는 교육


문학은 본래 정답이 없는 세계다. 같은 시를 읽고도 누군가는 쓸쓸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위로를 받는다. 한 편의 소설이 어떤 이에게는 현실을 돌아보게 하고, 다른 이에게는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문학은 그렇게 사람마다 다른 울림을 만들어내고, 그 감상은 곧 독자의 몫이 된다.

하지만 교실에서 문학은 그렇게 다채롭지 않다. 시험에 출제된 작품은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 의미가 정해지고, 수업 시간의 해설은 해석의 기준이 된다. '이 시는 일제에 맞선 저항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 문장은 고국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와 같이, 문학 작품은 하나의 메시지로 단순화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감정과 해석이 삭제된다는 점이다. 문학이란 결국 누군가의 삶과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지만, 교육은 그 이해의 방향마저 정해 놓는다. 그 순간부터 문학은 마음을 움직이는 언어가 아니라 채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정답 없는 수업을 상상하며


해외에서는 문학 교육의 방식부터 다르다. 책의 일부만 따와서 의미를 분석하기보다는, 책 전체를 온전히 읽고, 그것에 대한 자기 생각을 에세이로 풀어내는 수업이 많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어떻게 읽었고 왜 그렇게 느꼈는가'다. 감상과 해석의 주도권이 학생에게 돌아가는 구조다.

이런 수업에서는 틀려도 괜찮다. 오히려 틀림으로부터 더 나은 생각이 탄생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통해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조금씩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데 집중하는 교실 안에서 비로소 창의성이 움트기 시작한다.

한국 교육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지기 어렵다. 여전히 입시 중심의 현실은 교실을 틀 안에 가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교육은 여전히 틀을 가르치되, 그 틀 안에 사고의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그래야 학생은 정답을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만의 관점과 언어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생각의 출발점은 교실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정답을 잘 고르는 법을 배워왔다. 하지만 세상은 정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 공감과 소통 같은 능력은 이미 준비된 답을 외워서는 키워지지 않는다. 틀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과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주입식 교육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지 모른다. 어떤 지식은 여전히 전달되고 외워야 하며, 교육의 효율도 무시할 수 없는 가치다. 하지만 그 안에서조차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틀려도 괜찮은 공간, 자기만의 언어로 말해도 되는 교실이 필요하다.

교육은 본래 '생각의 힘'을 키우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고 해석하며 자기 언어로 말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 그게 교육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단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일 것이다. 그 출발점은 여전히 교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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