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정체성이 담긴 음식, 김치
밥은 없어도 김치는 있어야 한다.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도, 라면을 끓여 먹을 때도, 우리는 습관처럼 김치를 꺼낸다. 어려서부터 늘 곁에 있었고, 자연스럽게 입맛에 익숙해진 맛이기에 김치는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그냥 당연한 음식처럼 따라온다.
해외에 나가 있으면 김치 생각이 자주 난다. 햄버거도 먹고 파스타도 먹지만, 며칠 지나면 입 안이 허전하다. 뭔가 개운하게 마무리해 줄 무언가가 빠진 느낌. 그럴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늘 밥상에 있던 김치다. 낯선 음식들 사이에서 익숙한 김치의 맛을 떠올리는 순간, 입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김치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그리움이고, 정체성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결국 기억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김치는 기억이다.
그런데 왜 하필 김치일까? 한국 음식 중에는 다른 반찬도 많고, 국도 많고, 불고기처럼 인기 있는 음식도 있다. 그런데 왜 유독 김치가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되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김치의 맛보다, 그 안에 절여진 시간과 기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치는 처음부터 특별한 음식은 아니었다. 그저 채소가 상하지 않게 오래 보관하기 위한 지혜였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에서 겨울은 길고 매서웠고, 땅이 얼면 신선한 채소는 구할 수 없었다. 그러니 가을이 되면 수확한 배추와 무, 열무를 소금에 절이고,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 두는 것이 일상이었다. 김치는 그렇게, 겨울을 나게 해주는 음식이었다.
지금처럼 매운 김치가 만들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고추가 한반도에 전해진 건 16세기말 무렵이고, 그전까지는 소금으로 절이고 젓갈로 감칠맛을 낸, 담백한 물김치나 백김치가 주류였다. 빨간 고춧가루가 본격적으로 김치에 들어가고,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의 배추김치가 자리 잡은 것은 18~19세기 무렵의 일이다.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모습이 변화해 온 김치는 처음부터 어떤 고유한 맛이나 상징성을 가진 음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저장 음식이 수백 년 동안 한 민족의 밥상에 빠지지 않고 남아 있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맛의 문제가 아니라, 계절을 견디고 이웃과 가족의 정을 함께 담아 온 시간의 결과였다.
김치는 혼자 만드는 음식이 아니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수십 포기의 배추를 다듬고 절이고 속을 넣는 김장은 단순한 음식 준비가 아니라 함께 계절을 건너는 방식이었다. 누군가는 배추를 씻고, 누군가는 소금을 뿌렸고, 한쪽에서는 다진 마늘과 생강, 젓갈을 섞어 양념을 만들었다. 손은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였고, 그 틈에도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김장하는 날의 풍경은 분주했지만 따뜻했고, 그렇게 함께 만든 김치는 겨울 내내 밥상 위를 지켰다.
김장은 가족의 기억이자, 이웃과의 기억이기도 했다. 부족한 집에는 김치를 나누어 주고, 일이 많은 집에는 서로 도우며 품을 보탰다. 배추를 함께 씻고, 함께 절이고, 함께 버무리는 그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정을 쌓았고, 그 정은 한겨울을 함께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김장은 단지 음식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어주는 계절의 의례였다.
그래서 김치는 고비마다 곁을 지킨 음식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전쟁, 가난의 시절처럼 삶이 휘청일 때도 사람들은 김치를 담갔다. 무가 있으면 깍두기를, 열무가 있으면 물김치를 만들었고, 아무것도 없을 땐 소금물에 채소를 절여 식탁에 올렸다. 밥상 위에 오르는 모습은 달라졌어도, 김치는 늘 그 자리를 지켰다. 고단한 시절을 버텨내게 해 준 건, 그 익숙한 맛 하나였다.
그래서 우리는 김치를 단지 반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배추에 고춧가루를 버무린 음식일 뿐인데도, 김치는 유독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엔 맛이 아니라 시간이, 손맛이 아니라 마음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김치는 우리가 견뎌낸 계절을 기억하고, 수많은 식탁 위에서 시대를 건너왔으며, 오늘도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다. 생존의 기록, 가족과 이웃의 정, 익숙한 그리움이 깊이 밴 맛. 그 안엔 오랜 시간 한국인이 나누고 쌓아온 마음이 함께 절여져 있다.
우리는 늘 김치를 먹어왔고, 그 안에서 우리를 다시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