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소롭게 Apr 15. 2021

부부싸움 칼로 물 베기는 거짓이다

뭘 베든 칼은 칼이다

"상담을 받든지 여기서 각자의 길을 걷든지 결정해."


첫아이 출산 후 몸과 마음이 일그러져 있을 때였다. 남편의 제안 아닌 협박이 내 가슴을 후볐다. 너덜너덜해진 자존감과 애처로이 고개 들고 있는 자존심. 무엇 하나 고무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남편이 공격적으로 내뱉은 저 말 자체도 이해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간신히 내뱉었다. "생각할 시간을 줘." 그랬더니 곧바로 날아온 남편의 대답, "이게 생각할 일이야?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야지."



문제?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맨 처음 든 감정은 맥아리 없는 분노였다. 불 같은 분노도 열정이 동력으로 쓰인다는 걸 그때 알았다. 화가 났지만 동시에 너무 지쳐있었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제 풀에 쓰러진 분노 다음엔 자기연민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나 참 딱하네, 몸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란 사람한테 이런 소리나 듣고 있다니. 마지막으로 절망감. 남편과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늘 자잘한 일로 언쟁이 커지는 악순환의 궤도에 올라타 있었다. 우리는 진짜 여기까지인걸까?







갑자기 뇌리를 스친 한줄기 생각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랬다. 나한테 지금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바로 문제였다. 그만큼 내 감정이 메말라있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뼈를 깎는 듯한 아찔한 고통이 내 가슴 정중앙을 짓눌렀다. 그곳에 아직 버리지 못한 자존심의 찌꺼기가 남아있었던걸까. 스스로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자 모든 상황을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동안 남편과 갈등이 생길 때마다 늘 방어 기제를 사용했다. 비난의 화살촉을 남편에게만 겨눴다. 갈등 유발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으려 했다. 싸움의 원인이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닌데 모든 걸 남편 탓으로 돌렸다. 임신 호르몬을 핑계로(100% 핑계라고만 할 순 없지만)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마주하지 않으려 했다. 내 결혼생활과, 새로운 식구가 생긴 우리의 가정, 남편과 나의 관계,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남편과 싸울 때마다 내가 선택한 방어기제는 침묵이었다. 그냥 그 상황에 있는 게 싫었고, 내가 무슨 말을 하면 할수록 남편은 더욱 말이 많아졌다. 그럼 나는 귀와 입을 닫았고, 남편은 자기 얘기를 듣지 않는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문제는 나만의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갈수록 남편의 분노 또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상담을 통해 남편과 내 안에 내재된 어른아이의 모습을 알게 되면서 이해하게 됬지만, 예전엔 남편과 내가 너무 안 맞는다고만 생각했다.


부부싸움 칼로 물 베기는 거짓이다. 칼로 물을 베든, 두부를 베든 벤 사람과 맞은 사람에겐 상처의 잔재가 남아있다. 칼이 지나간 자리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제대로 돌봐주지 않으면 조금씩 곪아간다. 곪은 상처는 썩어서 문드러진다. 발견했을 땐 이미 늦지만 선택권은 남아있다. 썩은 상처를 부여잡고 병들어가든 생살을 잘라낸다는 생각으로 분골쇄신하든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미성숙한 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상처가 곪기 전에 치료해주고 더 건강한 내가 되기로 했다. 문득 이런 다짐을 할 수 있도록 부부싸움이 격화된 게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 삶을 탄탄하게 꾸려갈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이다. 여전히 성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남편에게 내 시선이 꽂혔다. 돌연 남편의 화난 얼굴에서 두려운 감정이 느껴지는 기괴한 경험을 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그래, 해보자 상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