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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롭게 Apr 22. 2021

발가벗은 너에게

속내의 알몸

"네, 남편이 외국인이라 영어로도 상담이 가능할까요?"


마땅한 상담기관을 찾는 것부터 녹록치 않았다. 상담 얘기를 꺼낸 건 남편인데 발 벗고 나서는 건 내 쪽이었다. 또다시 남편한테 향하려는 화살촉을 얼른 내게로 돌렸다. 그래, 누가 알아보든 뭐가 중요해. 우리를 위한 일이면서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사실 상담기관을 알아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남편은 결혼 초에 스치듯 흘려 말한 적이 있다. 20대 초반에 성인ADHD를 진단 받고 한동안 약을 복용했다고 말이다.



성인ADHD가 뭐야?



ADHD 앞에 '성인'이 붙은 게 생소했지만, 내겐 ADHD라는 용어 자체도 그랬다. 남편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 그때 당시 대강 흘려 듣고 잊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첫아이가 태어나기 약 두 달 전, 남편이 그 얘기를 다시 꺼냈다. 이번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현재 본인이 고강도의 업무환경도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데, 아이까지 태어나면 어떻게 될 지 두렵다고 했다.








용기를 내보고 싶다고 했다. 20대 초반에 복용한 약물은 부작용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도에 치료도 흐지부지 되고 한국에 왔지만, 이제 우리 가정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적절한 처방과 치료를 받고 싶다고 했다. 내 머릿속엔 수십개의 물음표가 동시에 떠올랐다. 질문들이 한데 뒤엉켜 말문을 막았다. 남편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막막한 심정 한가득이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출산을 앞두고 있는 내게 두가지의 부담이 양 어깨 위를 무겁게 누르는 듯 했다.


둘이 합심해서 아이 키우기에도 버거울텐데, 나 혼자서 아이와 남편을 둘 다 케어해야하는 상황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반대였는데 말이다. 오히려 남편은 파트너로서 우리 아이를 함께 잘 양육하기 위해 큰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어쨌든 한국어에 서툰 남편을 대신해 그때 처음으로 상담기관을 알아봤었다. 남편은 바로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약처방을 받기를 원했다. 상담 먼저 받는 걸 권한 건 나였다.


왜냐하면 과거에 그 진단을 받고 10년도 훨씬 더 지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남편과 연애할 때도, 결혼 후 아이가 생기기까지 2년 남짓한 신혼생활 때도, 나는 남편에게서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별.다.른.문.제 - 지금은 반성 많이 하고 있다. 그냥 내가 무지했었다. 그때 내가 남편에게 상담을 권한 행위는, 마치 썪어가는 상처에 대해 상처전문가(?)와 대화를 통해 치료하라고 한 것과 같았다. 소독도 해주고, 약물도 병행하면서,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는건데 너무 1차원적인 접근이었던 것이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책임감 - 뭐가 어찌 되었든 내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사람으로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속내의 알몸을 마주한 듯한 야릇한 감정 - 배우자만큼 있는 속내 없는 속내 까발리게 되는 관계가 있을까. 남편은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린 듯 발가벗은 채였다. 편안해보이기까지 했다. 또 문득 부러워졌다. 나는 모든 걸 벗어버리고 속내의 알몸이 된 채 누군가의 앞에 앉아본 적이 있던가.


아, 그래서 그랬던거구나. 선반의 문이란 문은 열면 닫을 줄을 모르고, 밥 푸고 뚜껑을 열어놔 남은 밥을 말라붙게 만들고, 집 안의 불은 죄다 켜 놓고 끌 줄 몰랐던 게, 고질적인 건망증 때문이 아니고 주의력 결핍(AD)이었구나. 감정의 결이 한없이 세세하다가도 끓는 점 따윈 없이 돌연 폭발해버리는 게 과잉 행동(HD)에 속하는 거였구나. 




당신, 
그래서 그랬던거구나
용기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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