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易책을 갖고 간 것은 탁월한 선택
20대 초반 觀相學(관상학) 책을 봤었다. 그때에는 철학관과 점집에 “사주, 궁합, 관상, 주역, 운명”이란 단어를 써놓았으니 관상도 비과학으로 취급되던 시기다. 하지만 관상은 미신이 아니라 ‘통계에 의한 과학’이란 주장을 아직도 믿고 있다.
점집 간판 ‘관상’ 옆에 ‘주역’이란 단어가 있으니 비슷한 반열인 것 같으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 주역(역경)은 四書三經(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삼경: 시경, 서경, 역경=주역)에 드는 유교의 핵심 경전이다. 주역에 나오는 64괘만 알면 세상의 이치를 관통할 수 있다 하니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이나 내용이 조금 어렵다.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김승호著, 다산북스刊)’ 2015년판이니 구입한 지 10년 된 책이다. 저자가 ‘세상에서 가장 쉽고 재미있는 주역특강’이라 강조했으나 첫 페이지도 들춰보지 않았다.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 어렵다는 선입관이 강한 책이 ‘주역’이다.
이번 여행에는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것만 신경 쓰기 위해 책과 노트북을 갖고 가지 않기로 했다. 주기적으로 브런치에 올리는 이야기와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모두 예약조치 했기에 노트북을 사용할 일이 없고 또 세상사는 잠시 잊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이롭다. 책 한 권 정도는 갖고 갈 수 있으나 3명이 가는 여행이기에 갖고 가지 않는 것이 맞을듯했다.
구입만 하고 엄두가 나지 않아 몇 년 동안 읽지 않던 周易을 갖고 갈지 여부를 고민하다 떠나는 날 여행가방 지퍼를 닫기 전 안에 넣었다. 비행기가 지연출발하는 경우와 비행기 안에서 타임킬링용으로 무엇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핸드폰으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볼 수 있지만 오랜 시간 보는 것도 고역이다.
周易을 고른 이유는 부피를 줄이기 위해서다. 책을 빨리 읽는 편이기에 내용이 가벼운 책은 몇 권을 넣어야 하나 周易은 한 권으로도 충분할 것으로 판단했다.
다행스럽게도 비행기가 지연출발하는 경우도 없었으며, 밤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탔기에 탑승 후 식사하고 잠자는 시간으로 연결되어 책 읽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不用(불용)의 처지에 놓였던 周易은 새로운 용도로 탄생했다. 자연의 섭리와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주역을 읽는다고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용도로도 훌륭했다.
여인네들 나들이단장 하는 동안 읽기 좋았다. 떨어져 살았던 시간이 많아 작은아이의 꽃단장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행 떠나기 전 비행기가 지연출발한다던지 여러 變數(변수)를 생각해 준비물을 챙기며 점검했었다. 호텔이 아닌 에어비앤비에 묵는 것이라 휴대용 바느질세트와 손톱깎이가 있는 맥가이버칼까지 준비했지만 정작 챙겼어야 할 常數(상수)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욕실이 2개니 2명이 꽃단장을 한다 해도 시간이 2배로 걸리는 것은 아니다. 작은아이 꽃단장 끝나는 시간이 종료시간이다. 5년 전 큰아이까지 함께 간 여행에서도 아내와 큰아이의 꽃단장시간을 합친 시간보다 작은아이 꽃단장 시간이 길었다.
챙겼어야 할 常數를 잊고 있었으나 조금 주의를 기울여 읽어야 하는 周易책을 갖고 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문장을 이해하며 읽어야 하기에 몇 페이지 읽지 않아도 1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간다. 周易책이 없었다면 2시간씩 걸리는 여인네들 꽃단장을 심통 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멀리 기암절벽이 보이고, 에게해의 수평선이 아스라이 보이는 곳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周易을 읽게 될 줄이야. 한 문장 읽고 산과 수평선을 한번 바라보고... 하지만 周易책은 여전히 어렵다. 매일같이 常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작 반절 밖에 읽지 못했다.
귀국 후 읽지 못한 부분을 읽기 위해 책을 펴면 그렇게 잠이 쏟아진다. 아직도 읽지 못했다. 해외여행에서 周易의 용도는 타임킬링과 마음을 다스리는 용도였지만, 국내에서 周易의 용도는 달콤한 꿀잠을 부르는 것이다. 여러모로 유용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