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를 여니 진한 커피향이 사방으로 퍼진다.
*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책을 소개할 차례인데 이번처럼 치고 들어오는 이야기가 있다.
나주에서 보낸 소포가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발송자와 소포 내용물을 알지 못했기에 코가 알싸해지는 ‘영산포 홍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누가 보냈을까? 명절도 아닌데..., 크기가 조그마하고 밀봉포장이 아니니 홍어는 아니다. 박스를 여니 진한 커피향이 사방으로 퍼진다. ‘guatemala injerto 과테말라 인헤르또’
지금은 얼추 자족도시로 변했지만 공기업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2014.11월 분당에서 나주혁신도시로 이전했을 때는 공사판이었다. 선발대로 내려간 직원들에게서 첫 번째로 올라온 소식은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다. 도시 전체가 공사 중이다.’ 였다. 이미 여러 공기업이 이전했고, 이전중인데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처음 가본 나주 풍경은 ‘부산스럽고 삭막하다.’ 말고는 적당한 표현이 없었다. 선발대 첫 보고는 정확했다. 배 밭과 논을 택지로 조성하여 사옥, 오피스텔, 아파트를 짓고 있는 거대한 공사장이었다. 사방이 공사장이라 출퇴근길에는 건축자재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상가에는 중개사 사무실과 상가분양 사무실이 제일 많았고 두 번째로 많은 것이 24시 편의점 이었으며, 음식점 몇 개가 전부였다. 기러기들에게 필수인 세탁소도 없어 드라이클리닝을 하려면 10Km떨어진 舊(구) 나주시로 가야했다. 당장 구김 없는 와이셔츠 10벌과 다림판을 구매했다. 대도시에 살다 이전한 직원들은 생경한 풍경에 당황했다. 술집과 당구장 말고는 유흥시설, 문화시설도 없었다. 퇴근 후 아무것도 할 것 없는 이 삭막한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숙소인 오피스텔은 계속 공사 중이라 휴일에도 늦잠을 잘 수 없었다. 공사시작 전에 외출해야 한다. 낚시가 취미인 사람들은 인근 저수지로 향했고 등산이 취미인 사람들은 월출산, 무등산, 지리산으로 향했다. 숙소에 들어가지 못하니 낚시나 등산,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직원 10명이 돈을 갹출해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 놀이방을 만들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놀이방은 커피 볶고 맥주 만드는 공방으로 퇴근하면 공방으로 몰려가 커피 볶고 맥주를 만들었다. 맥주가 익으면 통닭을 주문해 맥주파티를 열곤 했으니 건강하고 건전한 모임이다.
공방 회원들이 볶는 커피와 맥주는 단가가 비싸다. 커피체인점 원두가격이 1kg에 5천원 정도할 때 그들은 3만 원 정도 되는 고급 원두를 사용했다. 맥주 한 병 제조원가도 만 원 정도 했다. 갓 볶아내고, 좋은 재료를 사용했으니 당연히 신선하고 맛이 뛰어났지만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가 취미로 하는 것이니 收率(수율)이 좋지 않았다. 커피도 生豆(생두: 과육만 벗겨낸 커피 콩)를 로스팅 할 때 과하게 볶거나 덜 볶으면 맛이 떨어진다. 맥주 만들 때도 도구 소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맥주가 되지 않는다. 醱酵(발효)아닌 腐敗(부패)되는 것이니 버려야 한다. 실제 단가는 매우 비쌌지만 공방에서 생산되는 커피, 맥주 맛은 일품이었다.
10명중 한명이 독립공방을 만들었다. 전문교육을 이수하고 대형 로스팅 머신을 구입하는 등 독립공방을 만들어 가는 시기에 퇴직하고 올라왔으므로 독립공방 차린 것을 보진 못했다. 하지만 공방을 차리기 전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비즈니스 타깃 및 포지셔닝에 대해 이야기 나눴으므로 사업구도는 대충 알고 있다. 기술쟁이들이 경영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어설프기 짝이 없다.
‘혁신도시 주민은 중류층이상이며, 유명 커피체인점과 개인커피점 들이 성업 중이니 커피수요는 많다. 하지만 개인커피점에 로스팅 원두를 공급하는 업체도 많으며 低價(저가) 원두 공급 사업은 전망이 좋지 않다. 그들은 대량구매로 生豆를 싸게 수입할 수 있으니 우리는 바잉 파워가 없어 저가시장에서는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 결국 고품질, 다품종, 소량생산 쪽으로 가야 할 것이나 관건은 한잔에 만 원짜리 커피를 몇 명이 마실 것이냐? 하는 것이다. 마진을 적게 해서 입맛을 빼앗고 시장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사업 시작하면 마수걸이 해 주려 했으나 팔아주지 못하고 올라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퇴직 후 2년이 되어 가는데 후배는 잊지 않고 로스팅 된 원두를 보내줬다. 정성스레 볶고 포장된 향긋한 선물 ‘과테말라 인헤르또’ 한 봉지
현재 독립공방에서는 원두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을 교육하며 같이 볶고 소량판매하고 있단다. 취미에서 시작한 일이며 코로나 상황에서 망하지 않은 것만 해도 성공한 셈이다. 취미와 기술을 나누는 공방을 운영하다보면 새로운 사업 아이템도 보일 테니 지금은 돈을 생각하기보다는 인맥 넓히고 시장탐색과 개척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선물 받은 인헤르또 맛은 바디감도 좋고 酸味(산미)가 적당했다. 두 가지 방법으로 드립해 봤다. 핸드밀로 성기게 갈은 드립커피는 라이트 바디감에 산미는 약했으며 산뜻한 향내에 깔끔한 맛이었다. 전동밀로 곱게 갈아 드립한 커피는 미디엄 바디감에 맛좋은 산미도 느껴져 일품이다. 이런 수준의 커피라면 유명체인점과 비교해도 맛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과테말라 커피농장 중 최고로 손꼽히는 엘 인헤르또 농장은 세계적 커피경연대회인 COE(Cup of Excellence)에서 8번이나 1위를 차지한 농장이다. 다양한 高度(고도)에서 질 높은 커피를 생산하는 농장으로 유명하다. 인헤르또 농장에서는 여러 품종을 재배하는 것 같은데 이번에 선물 받은 커피 품종은 모르겠다. 맛난 것 먹는 것만 좋아하는 ‘먹자파’지 공부 열심히 하는 ‘학구파’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