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박자 느리게 사니 직접 화낼 일이 적어 좋다.
채근담에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담담함을 조금 더하라. (서로 선두를 다투는 길은 가장 좁다. 뒤로 한걸음 물러난다면 길은 자연히 넓어지게 된다. 진함과 화려함을 추구하면 아주 짧은 순간 밖에 그 맛을 누릴 수 없다. 조금 담담한 맛을 추구한다면 즐거움은 더 오랫동안 지속할 것이다)”는 가르침이 있지만 혈기왕성한 시절에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에 대한 조그만 손해는 감수하며 살았지만 부당한 일에 즉시 반응을 하는 모난 성격이 있어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많이 부딪쳤다. 할 말을 하고 살아야 분이 풀리지 그렇지 않으면 분을 이기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성격이 모난 탓이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다듬어졌다. 세월의 풍파가 모난 바위를 둥글둥글한 자갈로 만든 탓이다.
때때로 보직 간부들 회의에서 보이지 않는 주먹이 오고 가는데 그런 경우에는 바로 개입하여 잘잘못을 따져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렸지만, 이제는 그에 대한 대응도 한 박자 늦게 한다.
1년 단위로 계약하는 운송계약 건이 있었다. 영업팀 계약의뢰 내용 부실로 총무팀에서 반려하여 재의뢰한 건이다. 상당 시간이 흐른 뒤 회의 석상에서 ‘영업팀에서 계약의뢰가 늦어 입찰을 못 하고 있다. 앞으로 건건이 계약해라.’ 총무팀장이 깜빡했는지 업무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실언을 했다. 직급이 낮고 어린 영업팀장이 공개적으로 스트레이트를 맞은 것이다. 나는 영업팀에서 재의뢰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회의 후 영업팀장이 억울한 표정으로 하소연한다.
‘총무팀 직원이 일 처리를 제때 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입니다.’
‘알고 있다. 어떻게 발생 건마다 개별계약을 하냐? 이전 계약을 연말까지 연장하고 새로운 계약은 입찰하는 것으로 하자.’
다음날 실상을 파악하고 회의에 참석한 총무팀장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용서를 구했다. 한 박자 빨리 말해 본인 주먹에 어퍼컷을 맞고 녹다운된 것이다.
안전사고 발생 후 안전담당자가 교육 참석차 일주일간 자리를 비웠다. 담당 팀장이 작성한 사고보고서 초안을 안전담당자가 보고는 ‘많은 내용이 누락되어 입원해 있는 재해자 잘못만 부각되었으니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이야기했단다.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재해자가 중환자실에 누워있으니 사고조사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으며, 안전담당자 본인이 진실을 밝혀 보고서를 작성하는 책임이 있는데 제 3자가 이야기하는 것 같아 기분은 좋지 않았다.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인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징계해야 하므로 전후 관계와 책임 관계가 명확해야 하나 사고 경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안전관리자의 말이 앞섰기에 발생한 사안이다.
‘안전담당자가 작성, 보고하라고 해라.’
안전담당자가 사고보고서를 갖고 왔는데 초안과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작업 지시자가 누군가? 재해자가 자발적으로 도운 것인가?’
‘재해자 조사를 하지 못해 정확한 내용을 모르겠습니다.’
‘조사보고서 송부기한이 있으니 초안임을 명시하여 본사로 보내고 재해자가 일반 병실로 오면 자세히 조사하고 인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재해 관련자 책임을 물어라.’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안전담당자가 뭐 하고 있나?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안전이냐? 안전사고가 났는데 교육을 가냐? 왜 보고서가 이 따위냐? 재발방지대책을 법규에 맞게 수립해야지 네 마음대로 수립 하냐? 사고 경위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함부로 떠들고 다니냐?’
한 박자 느리게 사니 입이 깨끗해졌다.
발주처가 급하다고 서두르는 소규모 해외공사를 추진하는데 잡음이 생겼다. 파견자를 선정하는 내부 문제로 인해 인력투입이 지연된 탓이다. 한 푼의 매출이 급한 상황이지만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면 어느 정도 수업료가 필요할 듯했고 공사금액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개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영업팀장이 애가 타서 물었다.
‘당장 파견 가능한 자원이 있으니 파견자를 임의 선정하여 진행할까요?’
‘아니다. 현장에서 파견 순번에 따라 통보한 직원들 비자발급 준비를 해라. 잘 되면 다행이겠지만 직원들도 관행만을 고집하면 어떤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고 느껴야 한다. 추후 커다란 공사를 위해 수업료를 한번 내보자. 공사를 수행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못하게 된다 해도 직원들 교육 효과가 있을 것이다.’
결국, 해외공사는 취소되었고 우리는 수업료를 물었다.
한 박자 느리게 사니 직접 화낼 일이 적어 좋다. 화내게 되면 아직도 혈기 왕성한 시절의 독설이 뿜어져 나올까 나 자신도 걱정되지만, 반대급부가 반드시 생긴다.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한 비판 강도가 세어지면서 나는 개, 돼지로 직원들 입에 회자할 것이다. 한 박자 느리게 말도 아끼고 모든 상황파악 후 이런 사정 저런 사정 고려하여 대처하니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적어지고 실수도 적어졌다.
고사성어 중 “牛生馬死”라는 것이 있다. 넓은 저수지에 말과 소가 빠지면 말이 빨리 빠져나오고 소는 걸음걸이가 늦으니 한참 후 빠져나온다. 하지만 홍수가 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말은 떠내려가면서도 거슬러 올라가려 안간힘을 다하지만, 급류를 당해내지 못한다. 반면, 소는 발걸음이 느리니까 흐르는 대로 가다가 서서히 육지로 헤엄을 친다. 결국, 말은 그 자리에서 맴돌다가 힘이 빠져 익사하고 소는 살아남게 된다. 때에 따라 빠르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담담하고 느리게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