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1) (강신주 등 7명著, 21세기북스刊)
발간사: 인문학의 첫 번째 질문, 나는 누구인가?
2010년 설립된 공익재단 플라톤 아카데미는 인문학의 심화연구지원과 대중확산을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 프라톤이 아테네 근교에 설립했던 ‘아카데미’와 기원후 15세기 피렌체의 현자 코시모 데 메디치가 중건했던 ‘플라톤 아카데미’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2013년 가을 학기에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개최된 3회 인문학 공개강좌의 강연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매회 2,000명 이상 청중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문학의 첫 번째 질문을 진지하게 경청해 주셨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을 권리(강신주)
인문학자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뉴는 닥 하나입니다. 자본주의를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획일화된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취업에 목숨을 걸고 전공에 관계없이 토익, 토플을 죽도록 공부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여유 따윈 아예 생각도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한순간도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돈을 얻기가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보다 타인의 요구에 맞춰 살게 됩니다.
취업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은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아무리 많은 연봉을 받아도 노예일 뿐입니다. 배부른 노예, 자본주의는 항상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합니다. 주인으로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부른 노예를 선택합니다. IMF이후 대학은 취업을 준비하는 학원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대학에서는 카프카를 논하고, 공동체를 논하고, 미래를 논하고, 역사를 논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을 이해하는 세 가지 화두: 몸, 돈, 사랑 (고미숙)
디지털문명은 제도와 서비스 과잉을 불러와 육체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반면 마음이 바빠지게 됩니다. 육체와 정신의 괴리가 생기며 몸은 무력해지고 정신은 엄청난 비만에 이르게 됩니다. 자의식의 과잉인 것이지요. 사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대부분의 질병은 자의식의 과잉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의식은 인정욕망이면서 자신에 대한 의식으로 하루 종일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생각하고 그것이 내 안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타인이 곧 나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때 그 타인의 기준이란 것이 아주 명확합니다. 바로 돈 많고, 예쁘거나 잘생기고, 스펙 좋고 등의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는 곧 화폐의 지배입니다.
인간에 대한 학문, 인문학을 말하다 (김성근)
어떻게 인간을 이해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나 자신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고, 바로 그 생각에서 인문학이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전향적인 생각뒤에 메디치가문의 현자 코시모 데 메디치(메디치가문의 2대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피렌체에 대학이 아닌 플라톤 아카데미를 만들었고, 바로 여기서부터 르네상스시대의 인문학이 탄생하게 된 거지요.
인문학이 추구하는 기본 가치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삶을 통해서 삶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인문학이 추구하는 기본 가치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진실된 삶, 이웃과 더불어 사는 도덕적인 삶 그리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멋진 삶과 의미 있는 죽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는 진실된 참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眞善美(진선미)의 인문학’중에서 진에 해당하는 ‘진리의 성찰’입니다. 두 번째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도덕적인 삶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과 성찰입니다. 이런 선에 해당하는 인문학의 성찰을 위해서 우리는 합리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도덕적 판단은 이성에 기초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의 과제는 ‘어떻게 죽느냐’ 즉 탁월함의 추구를 통해 얼마나 창조적인 삶을 살고, 그리고 얼마나 멋지게 죽느냐 하는 미에 대한 과제입니다.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멋진 삶을 살아야 가능합니다. 멋진 삶은 창조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는 어떻게 창조적인 삶을 탁월하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이 아름답다 (이태수)
음식도 지금 먹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음미하면 더 맛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삼킬 때처럼 허겁지겁 먹어치우기만 해서는 음식맛을 즐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그저 허겁지겁 살아버리면 사는 맛을 알 길이 없겠지요. 살면서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즈음 여기저기서 인문학 강좌가 많이 열리고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같은데, 그것은 그동안 너무 바쁘게만 살아온 우리가 드디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살 만하게 사는 것인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로 사는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누려 들면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