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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 미니멀리즘적 쾌락주의(1)

(에피쿠로스原著, 제이한著 리프레시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 불필요한 욕망을 줄이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 삶 -


프롤로그: 에피쿠로스를 다시 꺼내드는 이유(“잘 살기”를 고민하는 시대의 철학)

우리는 지금, ‘많이 가지는 삶’이 반드시 좋은 삶이라는 믿음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물건과 정보, 끝없는 목표 속에서 지친 사람들은 이제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버리고 줄이고 비우면서도 여전히 삶의 충만함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다시 호명됩니다.

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쾌락주의자이나 ‘즐기고 놀기 바쁜 인생’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가 말한 쾌락은 소란스럽고 요란한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깊은 평온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쾌락은 술과 연회를 즐기는 것도, 육체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성과 사유에 근거해 고통을 없애고 영혼의 동요를 잠재우는 삶이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불필요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적게 바라고, 적게 소유하고, 적게 흔들릴수록 우리는 더 많이 평온해질 수 있습니다. 그는 선과 악의 기준을 쾌락과 고통의 감각에서 찾았으며 즐거움보다 고통을 줄이는 선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의 철학은 죽음의 공포나 신의 응보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의 평화 ‘아타락시아’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책은 바로 그 철학을 오늘날 언어로 재정리해보려는 시도이며 에피쿠로스가 말했던 단순하고 평온한 쾌락의 철학을 미니멀리즘과 접목해 우리의 일상 속에 풀어냅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지속되고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쾌락이 필요합니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진짜 나 다운 삶을 찾아가는데 도움 되길 바랍니다.


1장 쾌락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당신에게

“쾌락”이라는 단어는 유쾌함보다 위험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인다. 왜 우리는 “쾌락”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다루게 되었을까? 그리스 철학에는 두 가지 윤리적 방향이 있었다. 스토아학파는 이성과 금욕, 덕을 중시했고 고통을 감내하고 감정을 억제하는 삶을 이상으로 삼았다. 에피투로스학파는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보며 고통을 줄이는 삶을 지혜로운 삶이라 여겼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스토아학파는 에피투로스학파를 반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쾌락주의”를 왜곡하여 설명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도 에피투로스의 철학이 더 정제되고 사유에 기반 한 체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논쟁에서는 언제나 자극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남는 법이다. 이후 기독교의 금욕주의가 그 이미지를 더욱 고착시켰다. 쾌락은 유혹이므로 유혹을 거부해야 구원이 가능하다 믿었다. 이러한 관점은 서구 문화 전반에 깊게 스며들었고 이후 수백 년 동안 ‘쾌락’은 죄의 문, 이성의 적, 타락의 근원이라는 이미지로 고착되었다.


우리 일상에서도 ‘쾌락’은 금기시 단어가 되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쾌락’을 삶에서 추방한 채 살아왔고, 그 공백을 스트레스, 불안, 중독으로 메꾸게 되었다. 하지만 오해를 걷어내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놀랍도록 단순하고 따뜻하다. “쾌락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 영혼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이다.”

이 말은 쾌락이 감각의 과잉이나 욕망의 탐닉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에피쿠로스는 화려한 식탁보다 소금 한 줌과 빵 한 조각, 시끄러운 연회보다 친구들과 조용한 대화를 더 귀하게 여겼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쾌락도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자극에 지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덜 자극적이지만 지속되는 평온, 더 깊은 집중과 쉼, 그리고 내 욕망을 나 스스로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이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세 가지로 나누었는데,

첫째,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

둘째,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

셋째, 부자연스럽고 해로운 욕망

예를 들면 배고픔을 해소하려는 욕망은 자연적이고 필수적이지만, 반드시 고급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욕망은 자연적이되 필수적이지 않다. 명예나 권력처럼 사회적으로 주입된 욕망은 부자연스럽고 종종 고통을 낳는다.

에피쿠로스는 첫 번째만 충족시키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몸은 건강하고, 마음은 평온하고, 욕망은 더 이상 번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삶은 대부분 두 번째와 세 번째 욕망의 집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단지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맛집’을 찾아야 하고, 잠을 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숙면템’을 구입해야 하며, 사회적 관계는 그냥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러한 욕망은 우리 삶을 피곤하게 만들고, 만족의 기준은 점점 더 바깥으로 밀려난다.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삶을 ‘쾌락의 탈을 쓴 고통’이라 불렀다. 욕망을 줄이는 것,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쾌락의 길이라 역설했다. 절제 없는 쾌락은 오래가지 않고 오히려 더 커다란 결핍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다.

“가장 즐겁게 사는 사람은 가장 적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흔히 쾌락을 이야기할 때 말하는 ‘재미’나 ‘흥분’은 금새 식거나 새로운 자극을 갈구하게 만든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그런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용한 기쁨, 심신의 안정, 불안과 고통의 부재를 더 귀하게 여겼기에 이렇게 질문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나를 평온하게 하는가, 아니면 더 많은 욕망으로 내몰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비교당하고, SNS를 통해 자극받으며, 끝없는 선택지 앞에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쾌락주의자는 그런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자기만의 리듬을 회복한 사람이다. 소비의 속도에서 벗어나고, 자기 욕망을 알아차리고, 조용한 공간을 찾아낸다. 그리고는 내 삶을 다시 배열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묻는다. 쾌락주의자란 무엇을 ‘더 많이’ 얻는 사람이라기보다, 무엇을 ‘덜 바라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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