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적으로 일해야 하는 구속된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뭐 하냐?’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다. 어떤 일을 해서 먹고사느냐는 질문인데 딱히 내세울만한 직업은 없다. 명함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받기만 하면 어색할까 봐 명함을 만들었지만 業(업)으로서의 명함은 아니다. 물론 ‘전업작가’라는 말도 농담이다.
퇴직 후 재미있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기로 하고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또한 퇴직 전에도 회사를 놀이터처럼 생각하고 다녔기에 ‘놀고 있어’가 가장 적합한 대답일 텐데 糊口之策(호구지책)을 물어본 상대방을 이해시키려면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다. ‘전업으로 애 본다’, ‘손녀 돌본다’라고 대답하면 모두 이해한다.
아이 돌보는 일은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는 일을 늘어놓다 보면 어려운 일은 하나도 없다.
애를 깨우고
아침 먹이고,
옷 입히고,
어린이집 가방 챙기고,
선크림과 모기기피제를 발라준다.
어린이집 등원시키면 오전일과가 끝난다.
한참을 놀다가 하원시키면 오후 일과가 시작된다.
저녁 먹기 전까지 키즈짐에서 같이 놀아줘야 한다.
놀이가 끝나면 손 씻기고
저녁준비하면
얼추 육아가 끝난다.
저녁식사 전
큰 아이가 퇴근하지만 아직 인수인계할 시간이 아니다.
손녀는 할머니와 같이 노느라 엄마에게 안기지 않는다.
또한, 할머니가 책 읽어주며 밥 먹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를 목욕시키는 것부터는 엄마 몫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퇴근하고 문을 닫는 순간 하루 일과가 마감된다.
아! 요즈음 한 가지 일이 늘었다.
목욕이 끝나면 머리를 말려야 한다.
할아버지 회전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아가며 머리 말리는 것을 좋아한다.
‘안녕히 주무세요’하며
한 번씩 안아주고 방문을 나서면 정말로 하루 일과가 마감된다.
“애 볼래, 땅 팔래?”하고 물으면 모든 사람들이 땅을 판다고 할 만큼 애 보기가 어렵다는 말을 유머스럽게 표현한 것이지만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실제 해보니 아이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땅 파는 일이야 계획된 물량을 자의적 판단에 따라 시간과 체력을 안배하여 재량껏 파면된다. 변수라고 해봐야 땅이 굳고 무르고 돌이 나오는 정도다.
애보기는 변수가 많고 일정 나이까지는 합리적 설득이나 설명이 통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이 알파이자 오메가다. 어제까지 맛있게 먹던 반찬도 싫다 하고, 깨끗하게 세탁된 옷은 싫다 하고 어제 입었던 옷을 내놓으란다.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지? 따지는 것은 어리석다.
어린이집에서 단체생활을 하니 수시로 아프다. 한 명이 감기에 걸리면 한 바퀴 돌아야 감기가 낫는 것이며, 용하게 피했다 싶어도 마지막 끝물에 수족구병에 감염되어 고생한다. 요행을 바라지만 건너뛰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도 조부모들은 습진이 생길 만큼 손을 씻는다.
손녀육아 첫 달이 지나자 아내 통장에 손녀돌보미 월급이 입금되었다고 해서 돌려주기로 했다. 적지 않은 돈이지만 수고비(?), 월급(?), 명칭과 돈의 액수와 무관하게 정기적으로 받게 되면 월급 아닌가? 월급처럼 받고 주 5일을 의무적으로 일해야 하는 구속된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돈을 받지 않는다고 근무태만이나 결근 등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가를 받고 손녀 돌보는 것이 그리 행복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반대로 의무감이 생기게 하기 위해 돈을 받는 지인들도 있다. 육아대가를 받고 안 받고는 당사자의 기질과 관련된 문제다.
노동강도로만 따지면 땅을 파겠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땅 파는 일에서 재미를 찾기 어렵다. 애 보는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재미로 따지면 따라올 놀이가 많지 않다. 1990년대 휴대용 디지털 반려동물 키우기 게임인 ‘다마고치’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었다. 손녀 키우기 재미는 ‘다마고치’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손녀 커가는 모습도 재미있으며 한편으로는 경이롭도록 신기하기까지 하다.
힘들다고 해도 휴일에는 손녀가 잘 놀고 잘 먹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내 아이들 키울 때는 왜 이 재미를 모르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말하기 시작하며 ‘할머니, 할아버지’ 한마디에 모든 것이 녹아내린다.
놀이로 생각하고 재미를 감안하면 큰애 부부가 건네준 수고비를 받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 두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할머니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할아버지는 느지막하게 손녀와 씨름하며 아이 키우는 재미를 만끽하고 있다. 게다가 해외여행 간다고 하면 큰애와 사위가 경비를 대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따지고 보니 거꾸로 육아비를 줘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