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하고 인정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운 경우가 있다.
주문하지도 않은 책이 배달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뭐지? 지인이 보냈나?’
최근 주문한 책중 배달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외출 후 택배박스를 받아보니 발신자도 내 이름이고 수신자도 내 이름이다.
최근 읽었던 책중에서 읽을만한 책을 지인들에게 보내곤 했는데 지인한테 보낸 책이 나에게 배달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인 주소가 변경되어 인터넷 서점에 등록된 주소를 변경만 하고는 수신자 지정을 하지 않아 기본으로 설정된 내주소로 배달된 것이다.
‘이런 한심한...’
‘완전 실망이다.’
주의를 기울여 클릭만 제대로 했다면 이런 일이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뜯었던 포장을 재포장하고 손녀집에서 우체국이 있는 광교 법조타운까지 운동삼아 걸었다
마침 등기로 보내야 할 서류가 있어 우체국을 가야 했으나 걸어가면서도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우체국에 가야 했기에 책을 포장하는 수고와 약간의 택배비용만이 추가된 셈이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일이었기에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것뿐 아니라 자책을 하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실수지만 한편으로는 나이를 속이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 이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
체념하고 인정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운 경우가 있다.
지난날을 회상하면 모든 사람이 똑똑하고 기억력도 비상했겠지만 이런 실수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회사 업무에는 꼼꼼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났고, 수천 명 직원들 이름을 모두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 정도 였지만 이제는 같이 근무했던 식구들 이름도 입안에서 뱅뱅 돌고 건망증도 늘었다. 생각날 때 메모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이었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연료가 아닌 서류(Document)로 운전된다는 원자력발전소 일을 오래 했다. 화력발전소도 비슷하지만 원자력발전소는 모든 행위가 서류화(Documentation)되어야 하기에 업무가 까다롭다. 모든 행위는 육하원칙에 따라 문서화되어 보존되며, 중요행위들은 회의에 의해 결정된다. 회의를 통해 하고자 하는 행위의 타당성과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이행결과에 대한 검토 또한 회의를 통해 인증된다.
간부들은 하루 일과는 회의로 시작되어 회의로 종결된다. 한창일 때는 발표내용을 몇 번만 봐도 원고 없이 키워드 몇 개 있으면 회의가 가능했었다. 원고 없이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이야기하며 회의했었는데 이제는 어림도 없다. 은행계좌나 전화번호를 옮겨적으려해도 몇 번을 확인해야 한다.
물론 한창때와 동일한 기억력을 갖고 있는 것도 있다. 아직까지도 차번호는 끝자리만 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예나 지금이나 기억력이 똑같다고 우길 수는 없다.
어느 날 배달된 책으로 인해 이제는 정말로 늙었다는 것을 실감했으니 이제부터는 자책하지 않으려 한다. 기억력감퇴와 주의력결핍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며 앞으로 비슷한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발생할 테니까. 오늘부터라도 내가 내게 보낸 책에 나오는 문구처럼 살아갔으면 좋겠다. 기억력에 대한 욕심도 내려놓고...
인생은 짧다. 노년에는 명예와 욕심을 내려놓자. 그리고 취미나 종교생활, 또는 평소에 관심이 있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에 몰두하며 인생을 즐기자. 지금 이 글을 보는 순간부터 시작하면 늦지 않다. 우리 모두 늙는다. 멋지게 늙어가자. - 법구경 마음공부 (정운著, 유노 콘텐츠그룹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