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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고 쓰기

544. #만년필

필기구의 브랜드같이 명품 같은 글이 나와야 하는데

by 물가에 앉는 마음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니 연관 산업도 관심을 받고 있다. 인문학 서적이 홍수를 이루더니 글 쓰는 법에 대한 책과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고 글쓰기 노트까지 등장했다. 책을 눈으로 읽는 것에 비해 기억에 오래 남길 수 있는 방법은 筆寫(필사)하는 것이니 필기구를 장만하고, 기억을 오래 저장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사용하게 된다. 차와 핸드백에도 명품이 있듯 필기구도 고가의 제품들이 팔리는가 보다. 필기구 전문 mall을 검색해보니. 준 대형차 한대 값인 시가 오천만원짜리 만년필을 보곤 깜짝 놀랐다. 이거야 원, 다이아몬드로 만든 것도 아니고...

특히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독서, 컴퓨터, 필기구가 필수적이다. 내 경우는 읽은 책 내용을 컴퓨터에 筆寫하는 방법으로 글쓰기 연습을 했다. 서머리한 내용을 업무 보고서 작성에도 활용하니 일석이조이며 컴퓨터가 없었다면 글쓰기 연습을 중도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업무용 필기구는 볼펜을 사용하나 끄적거리는 작업은 가끔 만년필을 사용한다. 하지만 만년필은 매우 아날로그적인 물건이며 불편하기까지 하다. 간편하고 번지지 않는 볼펜이 있으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만년필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잉크가 떨어지면 잉크를 넣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손에 묻기도 한다. 만년필을 사용하다보면 오, 탈자와 띄어쓰기를 고쳐야하니 컴퓨터에 비해 능률이 현저히 떨어진다. 만년필은 속도도 더디며 효율이 낮지만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유일한 장점이 있다.


초고속인터넷, 고속 열차, 인스턴트식품...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은 빠르고 간편함을 추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본인들이 만든 초고속 시대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느림을 찾는다. 한때 외국여행도 가이드의 빨간 깃발을 따라 10여일 만에 5~6개국을 초고속으로 둘러보는 패키지여행이 주류를 이뤘으나 요즈음은 느린 여행을 선호한다. 히말라야 트래킹, 산티아고 순례길, 슬로시티 증도여행 등 힘들여 걷거나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느림을 선호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매니아층에서는 LP판을 진공관식 앰프스피커로 듣는 추세이고 올드카, 고가구 또는 앤틱 디자인을 선호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주문즉시 먹을 수 있어 열풍이 불었던 패스트푸드의 인기는 시들해졌고, 주방장의 손길이 많이 가고 하루 종일 끓여야 하는 슬로푸드가 대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빠름’은 대유적으로는 ‘속도’, ‘결과’, ‘효율’, ‘경쟁’, ‘욕심’이기도 하다. 자동차 경주에서 1등을 하려면 ‘효율’높은 자동차를 타고 우승컵을 거머쥐려는 ‘욕심’으로 ‘속도’를 높여 ‘경쟁’자를 앞질러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준비과정부터 긴장해야 하고 운전 중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고, 우승을 하고나면 긴장이 풀어져 피곤이 몰려온다. 사실 자동차경주나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다를 바가 없다. 출근하면 남들보다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열심히 뛰어야 하니 퇴근길은 피곤하다. 돈과 명예를 갈망하는 욕망이라는 열차에 올라타면 죽을 때까지 좀처럼 속도를 늦추거나 내리지 못한다. 이처럼 ‘빠름’에 휘둘린 사람들이 잠시라도 여유로움 속에서 즐거움을 찾기 위해 ‘느림’을 찾는 것이라 판단된다.


글쓰기에 있어 ‘느림’의 대표적 물건이 만년필이기에 찾는 사람도 늘어나고 수요가 많다보니 오천만원짜리 명품 만년필이 등장했을 수도 있다. 십 수 년 전 몽블랑 만년필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수트포켓에 6각별이 있는 몽블랑 만년필과 볼펜이 꽂혀 있는 것이 멋있었는지 고위직 간부들이 몽블랑을 갖고 있었다. 포켓속의 몽블랑 만년필들이 명품 구실을 하며 유용하게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의 몽블랑은 ‘느림’의 상징이 아니라 ‘승진’, ‘출세’를 대변하는 ‘빠름’의 상징이었으며, 느림으로부터 받는 마음의 위로와 휴식이 아닌,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부러움’과 남들의 시선을 요구하는 ‘과시’의 산물이었다.(물론 아닌 경우도 많고 전부를 매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등단 후 지인들로부터 육각별이 그려진 펜을 포함하여 여러 개의 필기구를 선물 받았으나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장인 김정운교수처럼 만년필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선친이 쓰시던 銀製(은제)만년필이 있으니 고가의 명품만년필에도 관심이 없다. 사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만년필이 만들어내는 글씨의 굵기이다. 연필에 H, B와 같이 연필심의 강도가 있듯 만년필 촉도 아주 가는 것, 가는 것, 중간, 굵은 것, 아주 굵은 것 등 5가지 종류가 있다. 중간 또는 굵은 만년필 촉으로 사각거리며 종이를 긁어내리는 소리와 생각할 여유를 주는 것이 좋아 만년필을 좋아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다만, 필기구의 브랜드같이 명품 같은 글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까지 길거리 좌판에서 파는 물건 수준이라 못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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