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인문학(1) (전병근과 9인의 문답, 메디치刊)
서문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9명의 면면은 해당분야에서 손꼽히는 지식인, 전문가들로 전공분야도 고전부터 최첨단 학문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과거와 오늘, 미래에 걸쳐 인간과 사회를 읽는 안목을 제공하는데 충분할 것 같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출발점을 달리하지만 얽히고설켜 마침내 한곳으로 수렴하는데 바로 ‘인간 마음의 탐구’입니다.
왜 인문학인가(고전학자 이태수)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의 원뜻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데 ‘철학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이태수교수이다.
인문학이라는 게 본래 항상 근원을 캐려드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 하게 되어 있어요. 주어진 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안주하는 사람은 그런 열정이 생기지 않아요. 우리가 어쩌다 이런 제도를 만들게 됐나.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나. 이런 질문들에 관심이 있어야 인문학을 하게 되는데, 캐고 캐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고전 공부까지 가게 됩니다. 우리가 찾아 캐 들어가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것인데 그동안 잊고 있었기에 지금 다시 캐보니 낯설고 새로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은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내야 점수를 얻을 수 있는 탓에 대개 세분화된 주제를 연구할 수밖에 없어 우리 사회가 학자들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만 공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문학계의 큰 문제점으로 보입니다. 내 생각에는 인문학자들이 세분화된 전공분야에서는 뒤지더라도 인문학의 뿌리가 무엇이며 왜 우리사회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생각했으면 합니다. 인문학은 고급문화를 이끌고 가는 힘을 발휘할 때 대접을 받을 수 있지 외국 전문 학술지에 세부적 논문 하나 올렸다고 대접받는 것은 아닙니다.
기원전 8세기경, 문명의 초기단계에서는 문자가 나오기 전이라 많은 정보를 머리에 넣고 있어야 했던 사람들의 기억력이 비상했다. 문자가 발명되면서 기억력이 쇠퇴했고 머리가 좋다는 것은 빨리 배운다는 것이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기억력, 빨리 배우는 것이 중요치 않게 되었다. 이제는 여러 요소의 조합을 어떻게 잘하는가, 남이 못하는 구성을 어떻게 해내는가의 능력이 중요해졌다. 오늘날 지능에서 중요한 것은 남이 못 본 것을 연결하거나 없던 것을 상상해내는 능력입니다. 바로 ‘창의적 사고’지요. 그런데 이것이 인문학이 해오던 사고입니다. 이제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더 생산적인 성과를 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조르바가 준 선물(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김정운)
일본 나라대학 교환교수로 재직 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명지대 교수 사직서를 팩스로 제출하곤 그 다음날부터 후회했다. 일본의 차가운 방바닥을 뒹굴며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이 막막한 자유로움에 쫄고 있는 나에게 조르바가 또 그런다. ‘그따위 두려움은 개나 물어 가라지!’
사표 제출 후 예전같이 연구업적을 쌓는 차원이 아니라 지적호기심과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 공부할 수 있어 너무 행복했어요. 공부 욕심은 많은데 수업도 있고, 책임져야할 대학원생도 있어 외적인 조건이 충분치 않았어요. 사표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사회 지식인들의 문제가 뭘까? 지식과 일반인들의 삶이 너무 괴리돼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지식인들의 직무유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림을 그려 내 이야기를 훨씬 전달을 잘하고 싶어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시나 소설은 그림으로 표현하기 쉬운데 학문적 담론을 일상으로 소화해 내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나의 글이 가는 길(인문학자 정민)
불광불급의 저자 정민, 그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것으로 정평이 났다. 길게 늘여 쓴 석사학위 논문이 심사장에서 내 팽개쳐진 것이 대오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이란 보태는 게 아니라 줄이는 거구나.’
서양화에 대한 해설서는 많으나 우리 그림에 대한 해설은 아주 빈약합니다. 옛 그림 중에 白頭鳥(백두조) 두 마리가 산초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게 많아요. ‘백두’는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라.’는 뜻이고 산초나무는 씨가 많아 ‘자식 많이 낳으라.’는 뜻으로 한마디로 결혼을 축하하는 그림입니다. 이걸 조류학자에게 물어보면 백두조는 알고, 식물학자는 산초나무는 아는데, 왜 두 가지가 그림에 함께 등장했는지 아무도 설명을 못해요. 문화코드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10년 넘게 연구해서 ‘새 문화사전’을 만들었어요.
우리나라는 글쓰기로 국가시험을 보고 인재를 선발했던 글쓰기 문화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이 대단한 글쓰기 이론을 현대적으로 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간결성이라고 생각해요. 군더더기를 빼는 것인데 옛글 이론에서 주장하는 얘기로 형용사와 부사를 적게 쓰라는 겁니다. 한 글자만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글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글이 다 그렇습니다. 저는 원고를 쓰면 두 번, 세 번 소리 내어 읽어봅니다. 소리 내어 읽다보면 문장 몇 개가 걸리고. 같은 표현도 빼고, ‘그리고’가 두 번 나와도 빼고 호흡이 길면 자르고....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한 후 송고하는데 이렇게 해야 독자들이 매끄럽다고 생각합니다. 여운도 남고
독서에서 가장 착각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다독의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송나라 구양수가 말한 多讀(다독), 多商量(다상량), 多作(다작)을 이야기 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다독을 이것저것 일 년에 백 권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제일 나쁜 독서법입니다. 여러 번 읽어야 할 책도 있고 한번보고 지나가는 책, 목차만 봐도 내용을 아는 책도 있습니다. 1년에 백 권씩 억지로 읽는 독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곱씹어서 읽는 책, 되풀이해서 읽는 책, 가까이 두고 틈 날 때 마다 읽어서 환기해야 되는 책이 있으므로 획일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산은 베껴 쓰면서 읽을 것을 강조했지요.
책을 읽는 이유는 삶의 가닥을 잡아주는 하나의 보루라고 할까요. 책을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은 겉으로 보면 아무 차이도 없지만 치명적 차이가 있어요.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장치가 책이지만 내면의 성찰 없는 독서는 교만과 독선을 낳기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