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거나 어리석거나
눈부신 모습
연세 높으신 부모님이 제집에서 여러 날씩 지내시는 일은 여간해 없었는데, 말복부터 내려와 계십니다. 낡은 아파트를 손보는 동안 집을 비워야 하는 터라 불편한 여름을 겪게 되신 거지요. 일 많은 자식네서 눈에 보이는 일은 많은데 마음같이 움직여 주지 않는 몸이 안타까우신가 봅니다. 밭일하다보니 두 분이 문밖에 나와 서서 일하는 자식내외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이 제게 눈부십니다. 초라해도 좋고, 얻은 것이 대단치 않아도 괜찮습니다. 햇살아래서, 백발을 빛내며 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넉넉했습니다.
자랄 시간
그늘이 일찍 드는 밭 하나 있습니다. 해 잘 드는 데는 힘을 많이 쓰고, 그늘지는 자리에는 건성하게 되는 법이라, 잡초도 무성해 있는 밭인데 옥수수, 도라지, 곰취를 심었습니다. 새로 심은 더덕 씨가 제대로 앉지 않는다고 아내가 불평을 합니다. 그래도, 묵은 뿌리가 있었는지 꽤 실하게 올라오는 더덕 순들이 있어서 지주를 실어다 여기저기 세워 주었습니다. 더덕 순이 서로 기대고 엉키면서 여름내 뿌리를 내리고 알이 굵어지겠지요. 이제 갓 시작한 더덕도 천천히 자리 잡아 가게 될 겁니다. 노사도, 기다리는 일이기도 해서, 너무 조바심하면 힘이 듭니다. 자랄 시간은 줘야지요. 아이들 기르는 일이 꼭 그렇지요?
여행
여행하고 싶다고 아이가 이야기 합니다. 구름타고 거침없이 허공을 달리는 여행이야 불가능할 것 없습니다. 저녁마다 노을이 좋습니다. 노을에 마음을 싣고 마음 가자는 대로 가보는 거지요. 그리운데도 가보고, 그리운 사람도 오래 그리워 해보고, 아름답게 사는 그림도 그려보고, 그렇게 살아, 그 노을 아름다운 데로 흩어져가는 날까지 생각해봐도 좋지요.
아름답게
지더라도, 아름답게
불타오르다가 지고 싶다.
가을, 단풍들었다 지는
산과 들처럼
제 인생을 들고
아름다운 가을이 이렇게 이렇게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구나 제 인생을 들고 가을바람 속에 서 있기 마련입니다. 모두 아름답다 해야지요. 가을이 깊어 갑니다. 깊어가면서 더욱 그 아름다움 역시 영롱해 집니다. 사람의 가을이 또한 자연의 풍광처럼 아름다워 질 수 있기를...
작아서 좋은 정
이웃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애호박 두 개와 호박잎 몇 장 껍질 곱게 벗겨서 빈 부엌에 들여놓고 가셨습니다. 저녁 무렵 고추밭에 끝물고추 조금 따 들이고 돌아와 보니 그랬습니다. 남이 건네준 것이지만, 받고나서 마음에 남는 것이 따뜻하게 흐르는 정 뿐입니다. 작아서 좋은 정! 세상에 더러운 거래와 뇌물들은 보아라!
고추말리기
이웃할머니께서 생고추 한 소쿠리 들고 오셨습니다. 고추건조기에 넣어달라는 뜻입니다. 말리던 고추채반 몇 개 비워서 넣어드렸습니다. 지하철에서 조금 좁혀 앉으면 한사람 더 앉아 갈수 있는 것처럼, 고추를 좁혀 넣은 거지요. 말려주면 고추 두 근 주마고 하시더라는 이야기를 뒤에 들었습니다. 이런! 전조기 속에 누운 고추들이 자리 비좁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맙다하고 사양하면 될 일입니다.
미쳤거나 어리석거나
날이 차가워진 저녁에 사람들 만나 마주 앉으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지요? 마음 무거워질 사건, 사고 하도 많아서 수첩하나 꺼내들고 메모하지 않으면 일일이 기억도 못하게 생겼습니다. 막가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막가고 있는가 봅니다. 부패하지 않은 국가권력도 의심스러운데, 삭은 것도 발효한 것도 아닌, 푹 썩어버린 권력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결과가 고통스러운 서민들의 삶입니다. 도무지 편안해지지 않는 우리 일상의 원인이 어디 있는지 짐작이라도 하고 있다면 차라리 객쩍은 소리하고 웃고 말자 할 수 있을 테지만, 사는 게 왜 이 모양인지 그게 누구 탓인지도 모르고 살면서, TV채널이나 돌리고, 스마트폰에, 컴퓨터에 한눈팔고, 먹고 사고 즐기느라 정신 못 차리는 우리는 미쳤거나 멍청하거나 어리석거나 한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