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 사는 동안 꽃처럼(2) (이철수著, 삼인刊)

미쳤거나 어리석거나

by 물가에 앉는 마음

눈부신 모습

연세 높으신 부모님이 제집에서 여러 날씩 지내시는 일은 여간해 없었는데, 말복부터 내려와 계십니다. 낡은 아파트를 손보는 동안 집을 비워야 하는 터라 불편한 여름을 겪게 되신 거지요. 일 많은 자식네서 눈에 보이는 일은 많은데 마음같이 움직여 주지 않는 몸이 안타까우신가 봅니다. 밭일하다보니 두 분이 문밖에 나와 서서 일하는 자식내외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이 제게 눈부십니다. 초라해도 좋고, 얻은 것이 대단치 않아도 괜찮습니다. 햇살아래서, 백발을 빛내며 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넉넉했습니다.


자랄 시간

그늘이 일찍 드는 밭 하나 있습니다. 해 잘 드는 데는 힘을 많이 쓰고, 그늘지는 자리에는 건성하게 되는 법이라, 잡초도 무성해 있는 밭인데 옥수수, 도라지, 곰취를 심었습니다. 새로 심은 더덕 씨가 제대로 앉지 않는다고 아내가 불평을 합니다. 그래도, 묵은 뿌리가 있었는지 꽤 실하게 올라오는 더덕 순들이 있어서 지주를 실어다 여기저기 세워 주었습니다. 더덕 순이 서로 기대고 엉키면서 여름내 뿌리를 내리고 알이 굵어지겠지요. 이제 갓 시작한 더덕도 천천히 자리 잡아 가게 될 겁니다. 노사도, 기다리는 일이기도 해서, 너무 조바심하면 힘이 듭니다. 자랄 시간은 줘야지요. 아이들 기르는 일이 꼭 그렇지요?


여행

여행하고 싶다고 아이가 이야기 합니다. 구름타고 거침없이 허공을 달리는 여행이야 불가능할 것 없습니다. 저녁마다 노을이 좋습니다. 노을에 마음을 싣고 마음 가자는 대로 가보는 거지요. 그리운데도 가보고, 그리운 사람도 오래 그리워 해보고, 아름답게 사는 그림도 그려보고, 그렇게 살아, 그 노을 아름다운 데로 흩어져가는 날까지 생각해봐도 좋지요.


아름답게

지더라도, 아름답게

불타오르다가 지고 싶다.

가을, 단풍들었다 지는

산과 들처럼


제 인생을 들고

아름다운 가을이 이렇게 이렇게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구나 제 인생을 들고 가을바람 속에 서 있기 마련입니다. 모두 아름답다 해야지요. 가을이 깊어 갑니다. 깊어가면서 더욱 그 아름다움 역시 영롱해 집니다. 사람의 가을이 또한 자연의 풍광처럼 아름다워 질 수 있기를...


작아서 좋은 정

이웃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애호박 두 개와 호박잎 몇 장 껍질 곱게 벗겨서 빈 부엌에 들여놓고 가셨습니다. 저녁 무렵 고추밭에 끝물고추 조금 따 들이고 돌아와 보니 그랬습니다. 남이 건네준 것이지만, 받고나서 마음에 남는 것이 따뜻하게 흐르는 정 뿐입니다. 작아서 좋은 정! 세상에 더러운 거래와 뇌물들은 보아라!


고추말리기

이웃할머니께서 생고추 한 소쿠리 들고 오셨습니다. 고추건조기에 넣어달라는 뜻입니다. 말리던 고추채반 몇 개 비워서 넣어드렸습니다. 지하철에서 조금 좁혀 앉으면 한사람 더 앉아 갈수 있는 것처럼, 고추를 좁혀 넣은 거지요. 말려주면 고추 두 근 주마고 하시더라는 이야기를 뒤에 들었습니다. 이런! 전조기 속에 누운 고추들이 자리 비좁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맙다하고 사양하면 될 일입니다.


미쳤거나 어리석거나

날이 차가워진 저녁에 사람들 만나 마주 앉으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지요? 마음 무거워질 사건, 사고 하도 많아서 수첩하나 꺼내들고 메모하지 않으면 일일이 기억도 못하게 생겼습니다. 막가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막가고 있는가 봅니다. 부패하지 않은 국가권력도 의심스러운데, 삭은 것도 발효한 것도 아닌, 푹 썩어버린 권력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결과가 고통스러운 서민들의 삶입니다. 도무지 편안해지지 않는 우리 일상의 원인이 어디 있는지 짐작이라도 하고 있다면 차라리 객쩍은 소리하고 웃고 말자 할 수 있을 테지만, 사는 게 왜 이 모양인지 그게 누구 탓인지도 모르고 살면서, TV채널이나 돌리고, 스마트폰에, 컴퓨터에 한눈팔고, 먹고 사고 즐기느라 정신 못 차리는 우리는 미쳤거나 멍청하거나 어리석거나 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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