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은 도끼다(2) (박웅현著, 북하우스刊)
지난번에는 코카콜라 CEO의 멋진 신년사로 마무리 했고 오늘은 박웅현 작가의 두 번째 강독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미국도 CEO의 신년사는 헌법 규정 같은 규칙이 있답니다. 일단 친애하는 임직원 여러분이 있어야 하고요 그동안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냈고요. 또 새로운 도전을 맞는 우리의 자세 첫째, 둘째, 셋째가 있어야 하는데 더글라스 대프트의 신년사는 너무 멋졌습니다.
4강, 시대를 바꾼 질문, 시대를 품은 미술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토론을 요청하며 질문을 던졌어요.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죠. 그래서 ‘질의응답을 통한 깨달음은 영혼의 산파술’이라는 말이 나왔죠. 우리는 지금 질문이 있는 시대를 살고 있나요? 왜 대학에 가고 싶지? 왜 돈을 벌고 싶지? 왜 결혼을 하지? 왜 아이를 낳고 싶지? 이런 질문 없이 무조건 대학에 가고,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안 물어봐요. 아니 묻긴 묻죠. 자기 자신이 아닌 부모님, 선생님, 주변의 성공한 사람들에게 묻죠. 스스로에게는 묻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왜?’라는 질문이 존재했죠. 신의 말은 언제나 옳은가? 사후세계는 존재하는가? 인류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같은 질문들이요. 반면에 중세에는 ‘왜?’라는 질문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으면 그만이었습니다. 1417년 포조 브라촐리니란 사람이 독일 남부 수도원에서 고대 로마시인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필사본을 발견합니다. 이 책의 발견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은 중세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금서이므로 아주 오랜 기간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주는 신의 도움 없이도 움직이고, 사후세계에 경험하게 된다는 종교적 공포는 인간생활의 적이며, 쾌락과 미덕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뒤엉켜 있다.’ 중세시대는 모든 것이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고 지배되던 시대이며 면죄부를 팔던 시대였으니 신과 종교를 부정하는 책은 금서가 되는 것이 당연했지요. 그런데 이 책이 다시 필사되어 당대 지식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몽테뉴, 마키아벨리, 보티첼리가 읽게 되었고 神중심의 중세시대에서 人間중심의 르네상스 시대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어 ‘왜?’라는 질문이 활기를 띄게 됩니다.
딸아이의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는데요. 교환학생으로 베를린에 1년간 머물렀는데 그쪽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을 한답니다. 놀고 싶으면 놀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공부하고 싶으며 대학에 간대요. 어느 날 친구가 묻더랍니다. ‘넌 대학에 왜 갔어?’ 아이가 당황했죠. 한 번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은 질문이었으니까요. ‘대학은 당연히 가야지, 안가?’라고 대답하니 ‘공부할 게 있어야 가는 건데 왜 간 거야? 너는 철학을 왜 선택했어?’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조금 창피한 얘긴데, 내가 철학을 선택한 건 폼이 나서였던 것 같아, 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아.’ 아이는 자기 자신을 그제야 돌아보기 시작한 거죠. 사실 우리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잖아요.
5강, 희망을 극복한 자유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기행문
일반적인 여행서는 대상에 대한 객관을 담습니다. 기차표가 얼마이고, 맛집이 어디에 있고 하는 식의 객관적인 사실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은 ‘대상에 대한 저자의 사색’이 주제가 됩니다. 이 사람 외에는 건져 올릴 수 없는 것들이죠. 오늘 소개해드릴 기행문을 읽을 때에는 그것을 발견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은 ‘어떻게 삶을 대할 것인가?’라는 한 가지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는 온몸이 촉수인 사람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순간순간 예민하고 싶어 했죠. 그 순간에 온전하고 싶었던 겁니다.
다음은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문장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의 롤 모델은 카잔차키스인데 그와 같은 삶을 목표로 살고 있지만 잘 안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미소를 지으며 서 있게나
자신 앞에서는 엄격한 얼굴로서 있게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서 있게나
일상생활에서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게나
사람들이 자네를 칭찬할 때면 무심하게나
사람들이 자네를 야유할 때면 꼼짝도 하지 말게나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을 소개하기로 했으니 영국기행중 한 구절입니다.
억누를 길 없이 유혹적인 수평선의 부름을 영국인만큼 가슴깊이 느껴본 민족도 없다.
영국인들에게는 바다가 가장 훌륭한 묘지이다. 굽이치는 물살마다 영국인들이 잠들어 누워있다. 그들에게 먼 곳 혹은 유형지나 세상의 끝이라 할 만한 곳은 하나도 없다.
호기심과 탐색본능이 영국 사람들의 핏속에 있기에 그들을 바다로 끌어내고, 수평선 저 바깥에 무엇이 있을까? 거침없이 바다로 나아가 세계 강국을 건설한 영국 사람들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도전하고 모험하면서 많은 사람이 죽었겠지요. 그 과정을 통해 지금의 위치에 오른 영국의 도전정신을 느끼게 합니다.
6강, 장막을 걷고 소설을 만나는 길
밀란 쿤테라의 소설 ‘커튼’ 교재로 채택되어도 좋을 책이며 소설을 읽으려는 사람은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고 다른 소설을 읽으면 훨씬 재미있게 읽히기 때문입니다. ‘커튼’이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영화를 볼 때 어떻게 보세요? 우리의 주인공들은 우여곡절과 갈등을 지나 달콤한 키스를 하는 걸로 엔딩을 맞이하죠. 그렇다고 그동안 서로에게 준 상처, 아픔 이런 것들이 키스 한번으로 싹 잊힐까요? 현실이라면 일주일 후에 같은 일로 또 싸울 거예요. 그런데 그런 모습은 저기 커튼 뒤에 있어요. 보이지 않죠. 이 책은 커튼 뒤, 우리가 읽은 소설 뒤에 숨어 있는, 작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우리가 보지 못한 소설 바깥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커튼을 찢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루죠. 소설을 쓸 때 커튼 앞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 뒤를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던 소설가들이 있거든요.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세르반테스입니다.
밀란 쿤테라의 ‘불멸’이란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치통을 과소평가하는 지식인의 말입니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이 모든 생물을 포함하는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아무 고통이 없을 때의 이야기이지 치통 때문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도대체 무슨 예기인 거냐고요. ‘나는 아프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치통이 있어도 치열하게 생각하고 존재해야 하죠.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이미 1600년대 초에 그렇지 않은 작품을 쓰고 싶어 했어요.
‘돈키호테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질녀가 먹지 못하거나 가정부가 마시지 못하거나, 산초의 기분이 유쾌하지 않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주인공은 죽어가고 있는데, 가정부는 먹을 걸 먹어요. 그리고 누군가 유산을 기대하기 때문에 살짝 웃음을 머금고 있죠. 커튼을 걷어 올렸습니다. 세르반테스의 이 문장을 보고 쿤테라는 이렇게 말하죠.
‘짧은 순간동안 이 문장은 삶의 산문성을 가리는 커튼을 살짝 걷어 올린다.’
삶은 산문의 세계인데, 우리가 읽는 것은 운문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운문의 세계만 보는 거예요. 그것이 낭만, 즉 로맨스죠.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그걸 걷어내고 우리가 치통을 느끼게 두죠.
* 산문: 일기, 편지, 수필 등의 일상적인 언어로 짜인 글을 말한다.
* 운문: 시, 시조와 같이 운율을 갖춘 글인데 최소의 단어로 최대의 의미로 압축미를 나타내는 글을 말한다.
박웅현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의미는 우리의 삶은 인간적이며 현실적인데, 우리가 읽는 것은 아름답게 미화된 삶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