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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 자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 삶을 살아가고 있나?

by 물가에 앉는 마음

517.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 자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 삶을 살아가고 있나? (2018.06 Talk-Concert)


2018-6월 Talk-Concert 제목은 조금 길었습니다. 아마도 GT정비기술센터에서의 마지막 Talk -Concert라 할 말이 많았던가 봅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 자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 삶을 살아가고 있나?’ 물음 3개지만 같은 주제가 될 수도 있고 각개의 물음이 독립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 본인의 삶을 살다 갑니다. 미성년 시기에는 부모님과 선생님이 과정에 개입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성인이 되면 독립적 개체로서 주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人文’, 사람 ‘人’, 무늬 ‘文’, 문자 그대로 각자가 본인의 그림을 그리며 살다 죽는 것이기에 아무리 친한 직장동료나 가까운 친인척도 내 삶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무쏘의 뿔처럼 혼자 가는 것이지요. 사회생활을 하니 객관적, 보편성을 중시하고 공통적 가치도 존중하지만 결국 사람이란 주관이 객관을 뛰어넘게 됩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규범이나 가치 등 객관적 순리를 따라가려 노력하지만 결국 자신의 주관적 잣대로 사회적 객관을 재단하며 판단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주인일 수밖에 없습니다만 경쟁사회의 서열화, 양극화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권력과 자본에 휘둘리며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를 잊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직과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그럴듯한 수식어가 있지만 이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면 조직의 부품 또는 소모품같이 일을 하게 됩니다.


찰리 채플린은 자본주의와 산업화시대에서 비롯된 인간성 상실을 풍자하여 한때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기도 했습니다. 찰리 채플린 주연의 ‘모던 타임스’를 보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제품들의 나사를 조이는 노동자,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처럼 일해야 하는 부속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피곤하고 빈곤한 노동자들이 있는 반면 그들을 착취해 호의호식하는 자본가들이 있어 향후 몇 십 년 후에 전개될 미래를 내다본 통찰력 있는 배우이자 감독이었죠.

가끔씩 업무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려보면 모던 타임스에 등장하는 찰리 채플린과 내 자신의 유사한 모습에 놀라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내 자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내 삶을 살아가고 있나?’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내 자신의 욕망도 자제하지 못했습니다. 기술직중 최고 연봉을 주는 회사에 입사하여 매월 4번씩이나 주는 현금 맛에 길들여졌고, 승진이라는 멈출 수 없는 열차에 올라탄 내 자신은 내리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와 비슷한 신세였습니다. 욕심, 욕망 이런 것들을 내려놓는 방법을 알았더라도 달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테지요. 욕망, 욕심은 비단 저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2015년, 석유재벌 록팰러 재산이 3300억불이었는데 얼마나 더 있어야 충분하냐 물으니 ‘조금 더’라고 대답했답니다. 원래 사람의 욕심과 욕망은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삶에서 가족관계는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유교문화에서 배우고 자랐기에 자식에 대한 무한사랑이 ‘부모의 도리’라고 당연히 생각하지만 아이들의 삶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에 과연 내 자리가 있기나 한 것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부모의 무한사랑이 한편으로 좋아 보이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결혼 후 아이를 갖게 되면 또다시 본인의 삶을 희생하고 아이들에게 헌신합니다. 이런 것을 善循環(선순환)이라 해야 할지 惡循環(악순환)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버지로 기억되길 원하는가? 어떤 아버지가 될 것인가? 같은 질문 같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前者(전자)는 머슬로우的 관점이고 候者(후자)는 아들러的 관점으로 他者(타자)에게 어떻게 보여 지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남들의 따가운 시선이 있을지라도 주관적인 판단 하에 행동을 할 것인가? 조금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前者의 삶을 살 것인지 候者의 삶을 살 것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전생의 빚쟁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평생 빚진 사람처럼 자식 일이라면 눈 먼 사람같이 물, 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게 부모님의 삶이라고 하며 자식들은 받지 못한 빚을 받기위해 부모님에게 끊임없이 바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키우는 한편 ‘내 자신의 주인은 누구인가?’도 따져봐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잘하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따져봐야 합니다. 일본에서 ‘황혼이혼’이 유행한 후 우리나라에도 상륙했습니다. ‘부부는 前生의 원수’였기에 後生(후생)에 만나지 않으려면 서로에게 잘해야 하는데 ‘나’보다 ‘배우자’를 우선시 하다 보니 ‘내 삶’이 실종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요? 회사에서는 업무시스템 속의 부속품처럼, 가족 내에서는 돈 벌어 오는 기계, 집사람은 밥하고 청소하는 가정부로서의 삶속에서 실종된 ‘나’를 찾아야 하니 김정운교수처럼 사표 던지는 사람이 늘어나고, 아이들을 출가시킨 후 황혼이혼을 강행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죽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보람이 있다고 판단되는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역설적으로 그런 삶을 살아야 회사도 보람을 느끼며 다닐 수 있고 황혼이혼도 막을 수 있습니다. 나이 들어 궁상맞게 쪼그려 앉아 양은냄비에 라면 끓여 먹는 모습보다는 전생의 원수와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면서 사는 것이 보기 좋을 듯합니다.


돈에 대한 욕심, 자녀들에 대한 헌신, 부부간의 기대, 승진에 대한 욕망, 타인 시선에 대한 의식 등을 조금 낮추고 내려놓아야 내 삶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긴다는 이야기인데 에둘러 이야기하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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