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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가난하지만 행복하게(윤구병 著, 휴머니스트 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회사 식구들과 막걸리 한잔하는 날이면 자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들 커가는 행복부터 시작해 출근이 기다려지는 행복, 업무를 성공적으로 해냈을 때의 성취 행복 등이니 결국은 회사 이야기로 귀결되지만 처한 상황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입에 풀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없이 살면 ‘행복’보다는 ‘끼니’를 먼저 생각해야겠지만 회사 식구들은 확실한 중산층이며 신입사원들도 ‘끼니’ 걱정은 없다. 차고 넘치게 부유하지는 않지만 먹고 살 만큼 윤택한 일상의 소소함에서 ‘행복’을 찾았으면 한다. 물질적으로 부족하게 살아도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동경하기에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계신 분들이 존경스럽고 부럽다. 저자인 윤구병 씨는 뜻한 바 있어 심하게 가난하게 살고 계시지만 행복하신 분이 아닌가 한다.



저자는 서울대 철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 후 “뿌리 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을 맡았고 1981년 충북대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정년이 보장되는 교수직을 15년 만에 그만두고 1995년 전북 부안 변산에 농사지으러 들어갔다. 공동체야말로 우리 삶을 온전하게 지켜줄 울타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세운 변산 공동체는 여전히 20가구 50여 명이 느슨한 지역공동체 틀을 지키며 논 7천 평과 밭 8천 평을 일구고 있다. 이중 매끼 같이 밥 먹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식구는 20명 남짓하다.


조금은 가난하게, 불편하게, 그러나 행복하게

부러움도 섞여 있지만 빈정대는 농담으로 대학교수가 거지와 세 가지 닮은 점이 있다 한다. ‘말로 밥 벌어 먹고산다. 몸 편하고 마음 편하다. 한번 잡으면 끝까지 깡통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대학 떠나 산 설고 물선 곳에 농사일에는 까막눈인 상태로 온 지 다섯 해를 넘겼다. 농사는 머리로 짓는 것이 아니며 말품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도 없다. 하루 이틀 사이에 일머리가 트이는 것도 아니고 서툰 일손이 한두 해 사이에 잽싸지는 것도 아니다. 첫해 힘든 거야 그러려니 해도 서너 해 농사를 망치다시피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게으르거나 요령을 피우지도 않았는데 세 해쯤 되는 세밑에 우리가 지어 거둔 주곡을 돈으로 환산해보니 한 사람당 18만 원뿐이다. 먹고 쓰고 남은 돈이 아니라 경비를 제하고 남은 돈이다.

유기농 주곡 농사로 먹고 살 길이 열린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던 마을 어른의 말이 생각났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려면 퇴비 넣고, 벌레 잡고, 잡초 뽑아야 하는데 번번이 그 시기를 놓쳤다. 그래서 염소가 먹는 풀을 뜯어 나물로 무치라 했더니 도시 내기인 공동체 안식구들의 낯빛이 달라졌다. 요리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거다.

소득이 없으니 지출도 줄여야 한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세제나 비누를 쓰지 않는다. 수돗물도 잘 쓰지 않는다. 개울이나 우물가에서 빨래하고 씻는다. 연료는 삭정이나 장작을 쓰고 전기도 아낀다. 무엇이든 낭비하면 발전소를 돌려야 하고 수질도 공기도 땅도 오염되니 아끼는 것이다.


귀농에 관심 있는 분들이 모인 자리에 갔는데 질문을 받았다. “사는 곳 땅값이 얼마나 됩니까? 3만 원? 그 돈으로 땅 사서 농사지으면 은행이자를 제하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자연농법으로 힘 안 들이고도 농사를 짓는다 하던데 자연농법으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귀농의 뜻을 세우는 분들은 어차피 좀 더 가난하게, 좀 더 힘들게, 좀 더 불편하게 살 마음의 준비도 하여야 합니다. 농사 경험이 저처럼 거의 없는 사람이 농사를 시작하면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하던, 농약을 쓰는 농사를 하던 입에 풀칠하기 어려워요. 십중팔구 손해 보는데 수업료로 생각하세요. 도시 생활수준을 유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면 투기 영농에 손대기 쉬우나 농사는 투기가 아닙니다. 매스컴의 그럴듯한 성공사례에 현혹되지 마시고 땅도 나중에 사세요. 먼저 빈집을 거저 빌리거나 헐값으로 구해 몸만 와서 머슴살이하는 셈 치고 이집 저집 공일을 하다 보면 일머리도 트이고 땅 보는 눈도 생깁니다.”


좀 더 가난하게 사는 길, 좀 더 힘들게 사는 길, 좀 더 불편하게 사는 길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길이며 공생의 길이다. 내가 가난하게 살면 그만큼 이웃이 가난을 덜며, 내가 힘들게 일하면 그만큼 이웃의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이 걷힌다. 내가 불편하게 사는 만큼 이웃이 편해진다.

지나치게 일하면 일 할 맛이 가시지만, 몸으로 때우는 게 얼마나 상큼한데, 땀 흘려야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목구멍 타고 내려가는 막걸리 맛이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알 수 있다. 당장 끼니가 걱정되는 가난은 원수지만 스스로 선택한 가난은 그렇지 않다. 가난은 나눔을 가르쳐준다. 잘 사는 길은 더불어 잘 사는 길이고 나누며 더불어 사는 길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지난 5년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때이다.


탐욕과 건전한 욕망

욕망은 결핍의 산물이며 결핍은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요인이 있다. 멧돼지가 고구마 밭을 갈아엎고 새매가 병아리를 채가는 것같이 생리적 욕망은 모든 생명체가 갖고 있다.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물 이상을 섭취하는 것과 추위로부터 몸을 가리는 것 이상의 몸치장을 한다면 탐욕이라 할 수 있다. 요리문화와 의복문화는 역사적으로 고급문화, 즉 지배계급의 문화에 속했다. 다시 말하면 지배계급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곡식 대신 양념류와 과일을 심고 재배하니 보통사람은 끼니를 걸러야 했다. 또한, 지배계급의 옷치장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베잠방이도 걸치지 못하고 헐벗어야 했다.

스님들이 감물들인 옷으로 몸을 감싸고 오신채를 피하는 것은 부처님 행적을 본받은 것인데 부처님은 지배계급의 문화가 탐욕에 바탕이 있어 그 결과 중생이 굶주리고 헐벗으므로 모든 불제자는 탐욕을 확대 재생산하는 계급지배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생리적 결핍 충족으로부터 생존을 유지하려는 것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탐욕은 소유욕과 그것을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우러난 지배욕의 산물이다. 인간은 일을 통해 자연물을 육성하고 변화, 배양, 가공함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는다. 거기에 탐욕이 끼어들면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발생하고 자연 세계가 황폐화한다. 자연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는 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고르게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탐욕이라 하지 않는다. 탐욕은 제 몫을 키우려고 남의 몫을 가로채거나 제 몫을 쌓아두려는 데서 생기는 그릇된 욕망이다.

탐욕은 다른 사람의 노동성과를 가로채려는 힘센 자들의 왜곡된 욕망이다.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는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은 탐욕을 인간성을 죽이는 독이라 하셨고 佛國土는 무소유의 터전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탐욕에 기반을 둔 억압과 착취 없이 골고루 잘 사는 사회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호화로운 왕궁을 떠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저잣거리로 나선 것은 욕망의 축소가 아닌 건전한 욕망의 확산을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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