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지만,
520. 웃는 마음(2) (이철수著, 이다미디어刊)
부부싸움을 대화로 풀면 오히려 악화될 가능성이 있는데 어떻게 풉니까?
가정에서 어떤 감정의 찌꺼기도 남기지 않는다는 묵계가 있었다고 할까, 농사건 사회관계건 모든 일상을 함께한다는 합의가 있었죠. 세상에서 역할을 할 때도 일방의 강제에 따르지 않는다. 또 내 욕심을 채우는 사회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나름 안팎이 일치되는 삶을 추구해 왔어요. 대범하지 못한 사람인 탓일까? 함부로 살지 말자. 조심조심 살자. 그런 생각을 놓지 못해요. 인생도 존재도 달걀 한판 들고 가는 듯이 하나라도 깨트리지 말고 발밑을 살피며 간다. 그런 거죠. 이런 걸 나 혼자만 아니라 아내와 함께 해나가고 싶은 거예요. 우리 나이쯤 되면 삶의 회향에 관한 생각도 해야 하는데 아내와 줄이 손잡고 공부하며 간다. 이런 생각이죠. 나이 들면서 우리가 보잘것없고 유한한 존재라는 근원적 연민이 생겨요. 외로운 존재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새로 힘을 얻으며 사는 것이 부부라고 생각합니다. 부부관계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좋은 삶을 산다는 건 논리 모순 아닐까요.
대체로 사람들은 부와 명예를 얻으려 하는데 이런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요?
잘났다는 사람들도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있고, 가난하고 초라한 삶일망정 그 속에서 망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크게 긍정되지요. 중요한 건 하루하루가 에누리 없이 존재의 절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순간이 절정이고 완성이라는 것, 그것 없이 존재에 관해 긍정을 한다면 빈말이겠지요? ‘日日好是日(날마다 좋은 날)’ 이라는 게 실감나게 읽혀요. 부처의 씨는 어디든 다 있다는 말. 이 역시 혁명적이죠? 그 지혜로운 언어들이 내게 좀 더 실감 나게 이해되기를 바라지요.
가난으로 허리가 휘어지는 경우에도 마음자리를 잘 살피면 평안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관리한다고 문제가 다 사라지지 않겠죠. 살다보니 무서운 것은 따로 있더군요. 삶의 안락과 평안이 깨지는 일이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생활하는 일의 한없는 불안, 이건 세상에 사는 한 끈질기게 달라붙는 거 아닐까요? 비바람이 사납게 치는 날, 나무 위에 둥지를 튼 박새가 불안해하는 것과 우리 삶이 다를 게 뭘까요? 피해갈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것이지요.
참을 수 없을 만큼의 궁핍이 아니라면 젊은 날의 가난은 견딜 만합니다. 열심히 그림도 그리고 삽화도 그렸지만 늘 불안한 삶이었으나 대박을 꿈꾸진 않았어요. 검박한 삶을 생각하면서 염통 옆에 걱정보 하나 달고 살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웃으며 살았어요. 언젠가 딸아이가 이런 말을 합디다. ‘저는요, 가난하게 살아도 재미있게는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얘기를 듣고 안심했어요. 요즘 젊은이들을 88만원 세대라 하죠. 무슨 수로 가정을 꾸리지요? 안타까워요. 그러나 어떻게 보면 젊은 날의 가난은 당연해요. 부유한 젊음, 이게 오히려 부자연스럽지요. 가난에 너무 주눅 들거나 두려워 할 것 없어요. 아직 견딜 만 하다면! 견딜 수 있는 동안은! 욕심이 많아서 생긴 결핍감만 아니라면!
고민과 마음공부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달라진 것은 뭔가요?
1980년대 화가도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무언가 발언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활동했어요. 그러다가 여러 가지 회의가 오면서 존재의 내면에 관해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인간에 대한 다양한 실망이 시작이었고 불의한 체제에의 저항이 순정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경험했어요. 그렇다고 기존의 추악한 사회를 묵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편’에 관한 성찰적 반성 같은 것이 있었어요. 어쨌든 내 자신의 마음을 사회관계 속에서 비춰보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사람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인연 따라 불현듯 나타난 찰나적이고 사소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게 차츰 이해되기는 했는데 그게 생각으로만 머문다면 별 의미는 없겠죠. 몸으로 느껴지는 게 필요하니까요. 세상에는 이미 지혜로운 언어들이 많으니 새삼 언어들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니고, 지혜의 목소리를 눈이나 귀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들어서 알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그게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이게 요지예요. 듣고 읽어서 알아들을 뿐 몸으로 얻지 못하면 어차피 남의 일일 뿐이겠지요. 몸으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몸으로 느끼려 애써 왔어요.
만공스님이 76세에 이른 어느 날, 저녁 공양을 자시고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만공, 이 사람아! 그동안 수고했네. 나는 가네!’독백한 뒤 슬그머니 열반에 들었다. 생에 대한 집착으로 고통스러운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도 많다.
여기서 살다보니, 별로 가진 것 없이 힘들게 살아왔지만 죽음을 아주 홀가분하고 담담하게 맞는 분들이 많더군요. 이럴 때면 ‘평범 속의 지혜’를 다시 보게 됩니다. 평범이 잘 사는 방법인가 봐요. 영혼이라는 것도 살아 있을 때의 얘기라고 생각해요. 죽음 이후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산산이 흩어져갈 뿐 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살아 있는 지금, 하루하루를 절정으로 사는 일이 중요하지요. 낱낱의 삶이 소중하고 존귀하다는 생각. 그 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애써 살면 되겠다 싶어요. 그저...
일상에서 지지고 복듯 열심히 살다보면 ‘빼어난 정신’ 옳게 보는 눈 자체를 잃기 쉬운 것 같아요. 그래서 자연이나 책에서 길을 찾기도 하는데...
정신 흐린 전주노파에게 점심 한 그릇 대접하고 한마디 건넸어요. ‘제 아들놈 잘생겼지요?’ ‘뭐시여? 사람은 다 똑같아!’ 노인의 언사는 지식창고에서 나온 이론도 아니고 상투적인 립 서비스도 아닌데 ‘참 좋았습니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빼어난 정신을 만나는 일이 늘 좋아요. 몸으로 살며 체득한 달관과 초연함, 소박하고 따뜻한 태도, 참 많이 배우게 돼요. 평범 속에 스승이 있다는 것, 그게 좋다는 것, 우리가 머물 자리 역시 평범한 일상 거기고.
누군가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지만, 저를 지켜준 건 온통 사람이었어요. 대숲에서는 쑥도 곧게 자란다고, 좋은 사람 곁에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스스로 많이 모자라고 상처도 많았지만 좋은 분들 덕분에 그럭저럭 사람이 됐어요. 세상을 어떻게 살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어요. 좋은 사람들 곁에 줄 잘 서라고! 반듯하고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 곁에 머물라고! 유명한 사람들 곁에 서려고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