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구성원 대부분은 개인주의자라고 불려야 한다.
과연 저자가 개인주의자일까? 개인주의자라고 선언한 저자와 일면식이 없지만 글을 통해 만나본 문유석이란 사람은 우리와 같은 모습의 평범한 소시민이다. 저자와 같이 투쟁하기보다는 양보와 타협을 선택하고, 맡은 일에 충실하며 가족과 주변을 소중히 하는 것이 개인주의자라면 사회구성원 대부분은 개인주의자라고 불려야 한다.
프롤로그: 인간 혐오
나는 사람들을 뜨겁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혐오증이 있다고 까지도 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양 옆에 사람이 앉는 게 싫어서 구석자리를 찾아 맨 앞 칸까지 가곤 했다. 제주도 송악산에 처음 간 날, 둘레길 입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알록달록 등산복차림에 흥겨워 목소리가 높아진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무리를 보는 순간 바로 절경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 사람 없는 중산간 마을만 한참 걷다 온 일도 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회식이고 행사다. 어렸을 때는 친척들 모이는 명적이 제일 싫었다. 114 상담사가 ‘사랑합니다. 고객님’하기에 반사적으로 질색을 하며 ‘왜요?’ 한 적이 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무슨 근거로?’가 떠오른다. 그런 나지만 무인도에서 혼자 살수는 없기에 사람들과 어울려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인간형은 어느 조직에서나 사랑받기 힘들다. 하지만 사랑받으면 기대에 보답해야 하므로 귀찮은 일도 생긴다.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매사에 일일이 투쟁할 열의까지는 없기에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양보와 타협을 해야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타심이 크지도 않고, 인간애가 넘치는 휴머니스트도 아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법관을 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마음을 무겁게 할 때가 많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어쭙잖은 생각과 고민을 담은 글을 여기저기에 쓰기까지 이르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었다. 살아가며 만나는 불합리한 일, 안타까운 일, 분노하게 만드는 일에 대해 글을 쓰고 나면 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 모두는 개인과 개인이 모여 사는 ‘사회’에 관한 생각들이다. 분명히 안 내 삶이 우선인 개인주의자고, 남의 일에 시시콜콜 관심이 없으며 누가 뭐라 하던 내 방식의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살다가고 싶을 뿐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알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일이 아닌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피가 거꾸로 솟거나 눈물 나는 순간이 있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은 여전히 가슴을 내려앉게 만든다. 시퍼런 바다 속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사라지는 순간 몸이 떨리고 무섭고 무력해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순간들을 경험하며 조금씩 깨달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 같은 것인지.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문명이라 부르는 사회가 얼마나 허약한지. 그리고 나와 아무 상관없어도 타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옆에서 나 혼자 행복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지금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드리고 싶은 한 상궁 마마님의 말씀이 있다.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씨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하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하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변한 건 세대가 아니라 시대다
웹진에 실린 이십대 작가 장예찬의 ‘그들은 20대의 정치화에 관심이 없다.’라는 글의 논지는 이렇다. 386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선배들이 이십대들에게 ‘시대정신이 없는 세대’, ‘탈정치화 된 세대’라 부르면서 토익책 대신 짱돌을 들고 던지라는 꼰대질을 일삼는다. 하지만 그것은 이십대가 처한 상황을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빈곤 청년들은 알바, 구직하느라 생존자체가 급해 투쟁할 여력이 없다. 반면 그럭저럭 일자리를 구한 청년들은 월급은 적고 미래에 대한 큰 꿈은 없지만 적은 비용으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취미활동에 만족하면서 저성장시대에 맞게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집과 좋은 차는 사지 못해도 맛집 찾아다니고 여행을 다니며 즐거워한다. 그럭저럭 즐거운데 꼭 투쟁을 해야 하나?
이 글을 읽으며 일본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이십대 시절에 쓴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 나오는 일본 이십대의 사고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뉴욕타임스 도쿄지국장이 노리토시에게 ‘일본 젊은이들은 불행한 상황에 처해있는데 왜 저항하려 하지 않는 겁니까?’라고 묻자 ‘일본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유니클로나 자라에서 기본패션을 구입하고 맥도널드 런치세트로 식사하고 친구들과 수다 떨고 유튜브를 보거나 스카이프 채팅을 하며 가구는 이케아, 밤에는 친구 집에서 식사하며 한잔하니 돈을 들이지 않아도 나름 즐겁다.
실제로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의 행복지수는 근래 40년 중 최고치란다. 이에 대해 한 학자의 해석은 이렇다. 인간은 미래에 대해 큰 희망을 걸지 않을 때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 일본이 지금보다 더 심각한 격차사회, 계급사회가 되면 역설적으로 행복지수가 올라갈 수 있다. 버블이 깨진 지금 미래 희망이 없기에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일본이든 우리든 지난 시대의 기준으로 들이댄 ‘세대론’으로 현재를 설명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다. 처한 입장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다양한 개인들은 ‘세대’라는 카테고리로 묶는 것은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이십대를 괴물로 보는 것도 모든 것을 달관한 세대로 보는 것도 성급한 시각이다.
어린 시절부터 과도한 입시, 취업경쟁에 내몰렸던 젊은이들은 노력한 결과가 정당하게 평가받길 원한다. 그러다보니 어느 정도 배타적 성향을 띠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학만 졸업하면 대기업에 취직하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스트레스 속에 사는 젊은이들이 많다보니 위악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또 한편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환경보호에 관심을 갖고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최근 젊은 판사들도 소수자 보호관련 연구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현실에 만족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세대론 보다 모든 생물의 특징인 ‘적응’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변한 것은 세대가 아니라 시대다. 인간은 주어진 여건 하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저성장시대에 맞는 생존전략, 행복 전략을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것이고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 이상 비난 받을 일이 아니다. 소소하지만 다양한 행복을 추구하며 타인과의 비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현명한 방법이다. 문제는 그것이 지속가능한 가다.
시대나 환경이 변화되어 현재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이십대가 삼사십 대가 되어 지킬 것이 많아지고 침해당하는 것도 많아지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저성장시대 초입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았다 해도 일자리가 소멸되는 시대에 그 행복이 유지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현재에 만족하는 젊은이들에게 멸망의 예언으로 위협하는 카산드라가 설득력이 있을 리는 없다 트로이 사람들도 믿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불행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도 있음을 잊지 않는 일일 것이다. 어떤 젊은이는 백화점 주차장 바닥에 무릎 꿇고 모욕을 당하고 있고, 종일 알바 후 1.5평 고시원에 누워 희망 없는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 선생님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