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배운 것이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아무리 사실이라 믿어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서울대 게시판의 신림동 비하 논쟁” 기사를 읽었다. 서울대생 인터넷 게시판에 ‘신림역 근처엔 왜 이렇게 질 떨어지는 사람이 많나’ ‘패션과 외모, 머리 모양 등이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인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에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며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하나’ ‘글쓴이는 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송두리째 폄하 하는가’ 라는 비판이 있자 ‘왜 선비인척 하느냐’ ‘신림역에 모이는 사람들이 저렴하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반론이 나왔다.
같은 학교 졸업생으로서 무심할 수 없었다. 다만 전제할 것은 이런 발언들이 서울대생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왜곡이며 서울대생의 의견이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도 난센스다. 젊은 세대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의미 있다.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항변은 ‘팩트는 팩트다’라거나 ‘개취(개인취향)존중’운운의 논리다. 미국 백인청년이 ‘슬럼가 흑인이 더럽고 불쾌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개인적 의견을 말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사냥한 역사와 빈부격차, 불평등이라는 맥락에 대한 무지다 .인간 세상에는 뚝 떨어진 자치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그걸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더 심각한 것은 ‘왜 선비인척 하느냐’는 한마디다. 요즘 인터넷에 ‘선비질’이란 용어가 횡행하는데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으로 위선 떨지 말라는 것이다. 속 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하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 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1차 대전 패전 후 독일인은 막대한 배상금 부담에 시달렸다. 이때 나치들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유대인의 열등감과 사악함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며 아리아인의 우수성이 ‘팩트’라는 우생학까지 주장했다. 그들 마음속 심연에는 지금의 고통이 남의 탓으로 돌리고 회복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결국 성실하고 착한 가장들이 대량학살 당하고 피하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었다. 그게 우리 인간의 악한 본성이다. 여성차별, 흑인 차별, 이민자 증오... 우리의 본성은 전자발찌를 채워야 할 상습전과자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선비질’을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후배 세대의 위약은 선배세대인 나 같은 사람들의 위선이 낳은 것이다. 열린교육과 인간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내 자식만 잘 되라고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의 조직적 커닝을 시키느라 고전을 읽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권위주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막말과 냉소가 주는 쾌락에 도취했고, 그 결과 진보와 보수라는 탈을 쓴 반지성주의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는 인터넷생태계를 만들어냈다. 후배들에게 사과한다, 기득권을 다 누린 주제에 극심한 경쟁과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하는 후배들을 싸잡아 욕하는 선배의 일원이기에 말이다.
말이 흉기다.
사람이 살인하는 주된 동기로 ‘자존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건설 현장에서 숙식하는 노동자가 동료를 살해했는데 동기는 말 한마디였다. 특정지역출신 촌놈이라고 놀린 것이 발단이었다. 40년 해로하던 노부부가 있었다. 유순하던 남편이 부인의 입에서 나온 ‘개눈깔’이란 말에 살인을 저질렀다. 어린 시절 사고로 눈 한쪽을 잃고 모진 놀림에 시달렸던 그에게 그 한마디는 흉가였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급소가 있고 그것을 찌르는 흉기는 바로 ;말‘이다.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기 위해 전문가의 가의를 듣는데 그때 배운 것이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흔히 첫 번째 질문만 생각한다. 살집이 좀 있는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참말이기는 하나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는 말이다. 사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는 두 번째 문만 잘 지켜도 대부분의 잘못은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필요 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
나이 듦을 새삼 느낀다.
책을 읽다보니 예전에 읽었던 것 같다. 얼마 전 보내드린 ‘쇼퍼홀릭(shopaholic)은 아니지만’ 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책을 2권 구입했는가 보다. 이상하게 문장들이 낯익다. 저장된 서머리 파일 기록을 찾아보니 5년 전쯤 읽었다. 예전과 다른 기억력, 나이 듦을 새삼 느낀다. 예전 읽고 느꼈던 소감을 가져왔다.
저자와 같은, 아니 적어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면서도 솔직히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며 사는 것이 대한민국에서의 삶이 아닐까 한다. ‘나’보다는 ‘우리’가 먼저이고 ‘개인’보다는 ‘단체와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미덕인 문화에서 솔직하게 개인주의자로 살아가고 싶다는 고백은 더욱 하기 어렵다. 더구나 3府(부)중 가장 보수적이라 곰팡내날것 같은 사법부, 게다가 ‘꼰대’인 현직 부장판사인 신분에서.
저자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도 ‘개인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인 공기업 문화에서 30여년간 살다보니 ‘욕하며 배운다.’는 속담과 같이 요즈음 젊은 세대들이 볼 때는 ‘꼰대’와 다름없는 삶을 산다. 그렇게 살면서도 ‘적어도 나는 아니야.’하며 짐짓 아닌체하며 가식적인 삶을 사는 주인공도 내 자신이다.
‘자율이 창의를 높이고 성과를 창출한다.’는 생각은 일반적 타당성을 갖고 있기는 하나 절대성은 없다. ‘행복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순간 꿈은 이루어진다.’ 등도 같다. 극히 주관적인 시각임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후배님들에게 강요하는 것 자체가 ‘꼰대’의 모습이었다. 이상하게 퇴직 즈음에는 반성할 것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