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1) (이철수著, 삼인刊)
2005년 발간된 두 번째 나뭇잎 편지로 서문을 보면 그의 정직하고 진솔한 삶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글 쓰며 고민하는 부분을 잘 표현한 듯하다. 어쩌면 ‘넌 잘 살아?라는 힐문’보다 무서운 것은 내면의 자기검열인지 모른다.
서문
세상에 그림이나 글을 띄우고 살다 보니 제일 무서운 게, ‘넌 잘 살아?’라는 힐문입니다. 거친 말 함부로 한 것이야 사과하고 야단을 들으면 되지만 고상하고 순수한 이야기를 저질러 놓으면 말 감당이 쉽지 않습니다.
매일 저녁 책상머리에 앉아 한 장씩 적어 보낸 엽서를 꺼내놓고 남의 글처럼 다시 읽어보니 제 안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질문이 다름 아닌 그 말씀이었습니다.
- 스스로 잘 살면서 그 말씀 하셨던가?
씩씩하고 간단하게
- 예!
- 물론입니다!
- 당연히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지요.
부끄러운 하루하루를 때로는 뉘우치는 심정으로, 때로는 살아 있음을 고마워하는 심사로, 때로는 그저 막막해서 넋두리하듯, 써 보내고 세상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게 벌써 3년입니다.
신기루 같은 세상
인생이야, 때로 가난과도 싸우고 넉넉해진 호주머니와도 싸우고,
무명의 힘겨운 처지와도 싸우지만 허명의 터무니없음과도 싸우고,
어제는 그리웠는데 오늘은 미워진 사람과도 싸웁니다.
있던 권력이 감쪽같이 사라진 허망을 보고도 실체 없을 욕망을
보고 다시 달려갑니다. 신기루 같은 세상. 인터넷. 사이버. 온라인 ...
길이 보일 때
길은 언제나 멀다.
그 길에서 존재는 언제나 피곤하다.
쉬는 이들은 오래 걸어 왔다는 뜻이지!
쉬었으면, 다시 일어나 걸어야 하고
때로는 쉼 없이 걸어야 한다.
길이 보일 때, 조금 더 걷자.
- 이렇게 말해야 할 때도 있지요?
그만해, 그만하지 뭐, 천천히 해도 되지 않아?
그렇게 이야기해도 좋다면 그러겠지만.
해가 지려는 시간
해가 지려는 시간이면
그림자가 길어지다가 어둠 속에 모두 사라집니다.
허명, 재물, 권력... 많아지거든 준비하세요.
밤이 되려고 하는 거니까.
알고 있습니다.
누가 사주를 묻습니다.
- 저는 사주대로 안 살기로 했습니다.
하고 대답했지요.
- 얼굴에 굶어 죽자고 해도
밥 안 굶겠다고 씌어 있습니다.
- ...
그래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요. 굶어 죽을 리가 있겠어요?
그렇게 대답했지요.
시절이 어려우니 곳곳에 명리학 점술이 성행합니다.
그도 작은 위안일수는 있겠지만, 하늘아래 땅위에
스스로 존귀하다는 우리 존재는 어쩌자구요?
마음 비우면 온통 하늘이고, 절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겨울 채비
소나무가 조심스럽게 낙엽을 떨어뜨려서 겨울 채비를 한다.
늘 푸른 소나무도, 묵은 것을 버리고 무성한 것을 덜어서
푸름 일색을 지켜간다는 걸 안다. 소나무도
조등
다 살고 나면 ‘
조등하나 걸리지
나고 죽는 것 일상사
가난한 마을 골목에
조등 하나
부모님
이제 연세 많으신 부모님을 자주 뵙고 지내자한 다짐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한해 저무는데, 올해 안에 가서 뵙는 일도 뜻대로 안될 듯싶습니다.
외출이 드물어지신 뒤로 얼굴색이 희어져서 얼핏 뵙기는 고와도 보이고 좋아도 보이지만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활력은 많이 잃으셨단 뜻입니다.
부드러운 간식거리라도 앞에 두고 그저 평범한 이야기 나누는 저녁나절이 내년에는 조금 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쭈어 보고 싶은 말씀도 적지 않은데,
사는 게 늘 이렇습니다.
나누는 이야기 많지 않아도 함께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그도 좋은 일이지 싶습니다.
생각이 많아집니다.
낡을수록 좋아지는
아는 집에 가서 차 한 잔 마셨습니다.
옛 청화백자 잔이 적당히 익어 편안해 보였습니다.
묵은 인연이 좋은 것은 사람 사이가 오래되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낡아 갈수록 좋아지는 인간관계가 최고지요?
서로 마음 쓸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지낼 수 있는
그 좋은 관계를 위해서도, 무심한 듯 마음 드리고 마음 받아야 합니다.